기억은 늘 녹슨 쇠의 냄새를 풍겼다. 그것이 볕좋은 6월 파리 시내의 풍경이라 해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늘 자신의 머릿속에 사로잡혀 있었고 악몽은 어디서든 그를 습격해왔던 탓이다. 그러나 그날은 참 드물게 투명하리만치 날씨 좋은 초여름이었다. 매주 열리는 방브 벼룩시장은 여전히 보기에만 현란한 잡동사니를 너저분하게 먼지투성이 길가에 늘어놓은 채 물정 모르는 관광객들을 유인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갑자기 귓가에 파고드는 목소리에 그는 깊은 잠에서 깬 듯 눈에 초점을 모았다. 옆에 선 일행이 장난스럽게 그의 눈앞에 손가락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일행이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저것만 계속 보고 있잖아."
그제야 그는 상대가 가리키는 물건을 보았다. 한세기 쯤 다락방에 쳐박혀있던 어린애 장난감 상자를 통째로 들고나온 모양이다. 아주 폐품이 된 탁자 위에 허섭스레기가 다 굴러다니고 있었다. 바퀴가 나간 구식 차 모형에 좀먹은 드레스 차림 인형, 인형의 집이었던 일부, 구깃구깃한 모빌... 그 사이에 그 물건이 섞여있었다. 나무로 깎고 붉은 칠을 한 말 모형이다. 나름대로 페인트로 문양을 그려넣고 에나멜칠을 해서 낡은 물건이지만 손때 묻어 반질반질 윤이 났다. 그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저걸 봤다고?" "닮긴 했네. 빨갛고 요란하고 성질있는 것이."
일행은 손을 뻗어 말을 뒤집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임자였던 모양이군." 말 몸통 밑에는 조각칼로 삐뚤삐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전주인이었을 아이가, 한 세기 전에 정성들여 자랑스럽게 남겼을 자기 이름이. 일행은 멋대로 값을 물은 후 내미는 손에 터무니없는 유로를 지불했다.
"자." 그는 상대가 던져주는 말을 얼결에 받아들었다. 목각인형은 생각보다 더 가벼웠다. 속이 텅 빈 것처럼. "기념선물." 그 텅 빈 속 만큼이나 가볍게 상대는 말했다. 어차피 넌 날 기억해주지 않을 거라고, 다 안다는 듯이. 그는 말을 손에 쥔 채 기분나쁘게 웃었다.
"이따위 것."
충동적으로 여권과 지갑과 크로스백 하나 차림으로 떠난 파리 여행이었고, 상대는 오다가다 만난 사람이었다. 이틀밤 쯤 같이 보냈다. 그리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는 예상대로 상대의 이름도 얼굴도 다 잊어버렸다. 갈때 비어있던 크로스백 안에 빨간 목마 하나만 새로 들어있었다.
몇년이나 전이었을까.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몇번 이사를 하고, 갖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세간살이를 결벽증처럼 죄 내다버리고 갈아치우고 들어엎으면서 철새처럼 이동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은 계속 그를 따라왔다. 자기 손으로 버린 기억이 없으니 그가 일부러 챙겨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괜히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따라왔다고, 저 붉은 말이 이번에도 내 뒤를 물고 와 버렸다고 말하곤 했다.
지지지난번 집은 옆칸에 약에 쩐 락큰롤쟁이가 난리를 치는 단칸 아파트였다. 말은 때 탄 블라인드로 꽉 막혀 열리지도 않는 창가에 있었다. 창 틈새로 비가 새어들어와 말등 왼편 페인트에 물방울 흔적이 생겼다. 지지난번 집은 정체가 불분명한 여러 사람이 기척도 없이 셰어하는 풀랫이었다. 불면증이 있던 때라 말은 밤새 켜둔 전등 옆에 있었다.
지난번 집은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크고 황량한 원룸 스튜디오였다. 채울 가구도 없이 대부분 텅 빈 방에 운동기구와 캐비넷 몇개만 굴러다녔고 말은 그중 하나 위에 올려뒀다. 지금도 눈감으면 더듬더듬 문 위치와 전등스위치, 옷장과 캐비넷들을 되살릴 수 있다. 거기 놓아둔 목마도 훤히 보인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없다. 지금은 내 집이란 것도 없다. 그는 지금 임무로 멀리 건너와 있으므로. 벌써 반년 넘게.
"뭐해요, 텐카씨. 불 끄라니까."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그는 또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에 흐릿하게 보이던 넓고 텅 빈 방이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세간살이로 들어찬 낯선 방으로 변했다. 사람 사는 흔적으로 가득 한 누군가의 집.
먼저 자기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 반팔셔츠 차림으로 누우려다 말고 시문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갑자기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듯이 모든 것이 현재로 선명해졌다. 지금의 이름과 해야할 일이 빠르게 그를 조립해갔다.
"으, 으응?" 텐카는 스위치 위로 반쯤 뻗은 채 멈춰있던 팔을 의식했다. 그는 과장되게 손목을 붕붕 휘저으며 스위치를 탁 눌렀다.
텐카는 굳이 들으란 듯 킬킬거리며 자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싱겁긴, 하고 중얼거리는 시문의 목소리가 돌아눕는 이불 버스럭거리는 소리와 뒤섞였다. 불을 끈 자리에 어둠이 밀려왔다. 똑바로 누운 채 부릅 뜬 텐카의 눈앞에서 어둠과 잠시 가라앉았던 기억 속의 풍경이 뒤섞였다. 옷장과 TV의 윤곽이 허물어지며 대신 러닝머신, 옷걸이, 통유리창, 저쪽에 캐비넷, 그리고 목각 말이.
기억은 흐려진다. 반년 지나니 자기 집 광경도 가물가물거린다. 매끄럽고 서늘하던 매트리스 대신, 생판 모르던 남과 맞대어 깔아둔 요의 감촉이 익숙해진다.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붉은 말이 고요히 바라본다. 바다 건너 이제는 멀고 먼 집에 두고 온 말은, 차마 더 따라오지 못한 채 검고 어두운 눈으로 그를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다.
'언제 돌아올 거지?'
그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와 빨간 목마가 서로 마주보는 어둠 속을 가르며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그새 잠에 빠져든 시문의 낮은 숨소리였다. 삼켜버릴 듯 그에게 귀기울이면서, 천천히 텐카는 내뱉었다.
'꺼져, 하인리히.'
지독히 싫은 그 이름, 저주처럼 배에 새겨진 이름이 붉게 빛났다. 말은 뒷걸음질쳤다. 과거에서 온 목소리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넌 돌아올 거야, 하인리히.'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소리. 그가 얼마나 두고 온 것들을, 작은 장난감 말을 세워둔 방을 그리워하는지 이미 다 안다는 듯한.
시문이 낮게 웅얼거리며 뒤척이는 기척이 들려왔다. 텐카는 고집스럽고 피곤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무겁게 닫히고, 독일의 자기 집과 캐비넷과 붉은 목각말을 가물거리는 잠 너머로 억지로 밀어냈다. 악몽의 말은 하인리히를 등에 태우고 사라져갔다. 멀리, 말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