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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당신이 아주아주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 .'
소설가 민우는 약혼녀 은혜와의 결혼을 앞두고 집요하게 뒤따라붙는 시선을 느낀다 . 그는 그 시선 속에서 옛날 어릴 때 첫사랑이었던 미미의 흔적을 발견해내고 마스터의 바에서 실제로 그 시절 그 소녀의 모습을 간직한 미미와 조우하기도 한다 . 그리고 스토리상 약속된 것처럼 민우는 미미가 이미 예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듣는데 .
유령이야기를 입은 첫사랑 에고트립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그렇게 넘기기에 이 영화는 너무도 작위적인 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 특히 의도된 교과서 읽기 같은 (;;) 미미의 연기가 . 어쩌면 이것은 유령이야기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 이건 아마 민우의 미완성 소설일 지도 모르겠다 . 왜 , 흔히 있잖아 .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결혼 직전이 되니 사랑이 맞는지 아리까리한데 그녀의 아버지가 부자고 힘이 있는 건 확실하고 그녀도 내게 잘해주고 부족할 거 없는데 과연 이렇게 인생이 반쯤 팔려가듯 술술 풀려도 괜찮은 건지 , 글은 슬럼프에 빠졌는데 천재 소리는 부담스럽고 신작 재촉하는 출판사의 기대도 무겁고 난 걍 범재도 못 되는 굴러다니는 돌이라고 버럭 소리지르고 도망쳐버릴까 말까 에라시발 나는 무언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에고트립 시작하며 뮤즈 찾는 그런 아저씨 소설가 클리셰 말이다 .
결혼의 부담 속에 글은 안 써져서 아저씨 소설가는 약속된 대로 (...) 첫사랑의 추억 속으로 회귀하며 그 순수한 기억이 뮤즈가 되어주기를 갈망한다 . 그래서 그는 ' 소녀의 모습으로 죽어 여전히 소녀인 ' 미미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망상하기 시작한다 . 순전히 현실도피로 . 만약 미미가 지금 나를 찾아온다면 . 그러나 현실의 미미는 감당할 수 없으니 열일곱 그때의 미미로 하자 . 그녀는 그 나이로 죽었고 그 나이 그대로 여자가 아닌 채 순수하고 , 아무 조건이 아닌 나만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내게 쌓여있는 기억을 속삭여주는 것이지 .
그들이 만나는 바에는 장년의 마스터가 이해한다는 듯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준다 . 마스터는 자신이 죽은 아내와 처음 만나 영화를 본 날짜를 뜬금없이 읊기도 한다 . 후에 밝혀지기를 , 이 마스터가 말한 첫만남의 날짜는 민우가 미미와 만난 그 날이다 . 그들은 실제로 회상 속에서 그날 영화를 보았다 . 그러므로 이 마스터 역시 민우가 유령처럼 소환해낸 자신의 또다른 자아에 불과했다 . 즉 그 세계 속에는 결국 민우 자신과 미미의 환상 밖에는 없었다 .
그렇게해서 달콤하고 아련하며 풋풋한 첫사랑의 망령은 기괴하고 환상적으로 민우의 세계에 ( 소설가다운 ) 섬세하고 으스스하지만 신비한 활력을 불어넣는 것처럼 보였다 . 미미가 실제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까지는 .
민우가 느꼈을 미미의 죽음에 대한 놀라움은 여기서 반전된다 . 보통 유령영화에서 ' 사실 누구가 유령이었다 !' 는 충분한 반전이 된다만 이 영화에서는 너무 초반부터 대놓고 미미의 비현실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관객의 놀라움이 될 수는 없다 . 그럼 이 놀라움 장치는 관객이 아닌 주인공 민우를 위해 준비된 충격이었다 . 민우는 ' 미미가 죽었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 ' 미미가 죽어서 소녀 모습으로 자신에게 나타났다면 ' 이라는 가정으로 마음 속에 망상을 ( 표현 그대로 아주 그냥 소설을 썼던 ) 해댔던 것이다 . 그런데 미미가 정말 죽었다 .
그가 양심의 가책 없이 , 다시 만난 유령 미미와 자신의 애틋한 로맨스 비스무리한 걸 망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미를 현실과 완전히 분리하여 ( 지금쯤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바쁘게 하루하루 살아갈 30 대의 미미가 아닌 ) 그야말로 최애캐로 만들었기 때문 . 그러나 망상은 현실이 되었다 . 어쩌면 자신의 안전한 망상 뒤에는 으스스한 ' 진짜 ' 유령이 지켜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 유령을 망상하는 건 좋지만 실제 만나기는 싫잖아 . 더구나 스토킹하는 유령 따위라니 .
( 중간 어딘가의 장면 . 미미가 울면서 아저씨 일어나요 ,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 들어봐요 하고 민우를 흔들어 깨우는 모습 . 그러나 끝까지 민우는 일어나지 않는다 . 계속 함께 하던 모습을 보여주고서 왜 여기선 그가 자신을 듣지 못한다고 슬퍼하는 모습을 ? 어쩌면 이것은 민우의 망상이 아닌 ' 진짜 ' ' 유령 ' 미미였을 지도 .)
그때부터 민우는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 자신의 현실에 뒤늦게 집착한다 . 약혼녀가 있고 , 잘 부탁한다며 거금을 쥐어주는 예비장인이 있고 , 자신을 작가로 대접해주는 출판사 사람들이 있는 , 30 대의 작가 민우의 현실에 .
( 일식집에서 민우와 출판사 사람이 만나서 누구 한사람이 에어컨과 회를 갖고 꼬장을 부리는 장면 . 이 장면은 완전히 같은 대사와 거의 같은 동선으로 세번이나 반복된다 . 그러나 그때마다 작가님과 상대방은 바뀐다 . 제일 마지막 변주는 민우가 편집자고 원래 편집자가 작가님으로 등장하여 같은 대사를 주고받는다 . 민우는 이 마지막 환상에서 일종의 억압을 느꼈던가 혹은 반대로 자신이 누리는 작가라는 자리가 얼마나 뒤집히기 쉬운 자리인지 깨달았을 수도 있다 . 그는 이 장면 후에 , 작가로서의 허세인지 강박을 전부 던져버리고 핳하ㅏㅏ하ㅏ하하 하며 세계정복하는 키라처럼 자기 멋대로 글을 써갈기기 시작한다 .)
그러나 그가 천진한 소녀 뮤즈의 환상에서 눈을 돌렸을 때 이미 현실은 삐그덕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 갈라서자는 약혼녀를 붙잡고 그제야 그는 선택을 한다 . 그는 미미를 저버리고 약혼녀에게 자신을 위탁하기로 한다 .
그러면 그가 과거에서 불러낸 망령은 어떻게 해야 하나 . 그는 마음속에 쓰던 소설에 종지부를 찍어야했다 . 편하게 최애캐로 망상하며 굴리다가 빠이빠이 하려 했지만 , 정말 죽어버려서 이젠 떨쳐낼 수 없게 된 첫사랑을 최대한 아름답게 돌려보내고 자신의 청춘소설을 마감하기로 .
그래서 민우의 망상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 다시 미미를 만나 그녀가 죽던 순간으로 데려가 ( 사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기도 잘 모르는 주제에 ) 예쁜 비를 뿌리고 예쁜 자동차 불빛 사이에서 , 자기를 만나려는 기대에 한껏 들뜬 첫사랑에 빠진 소녀가 고통도 없이 ( 어쩌면 스스로의 죽음을 자각할 새도 없이 ) 사고로 가련하게 세상을 뜨는 . 망상소설에서 이제 자신이 죽었다는 걸 깨달은 미미는 이제 어른이 된 민우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면서 , 더없이 통속적이고 애절하게 ' 네가 많이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 ' 라고 흐느끼며 떠나간다 .
민우는 결혼한다 . 그리고 정말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아내와 바다를 본다 . 그는 아내가 약혼녀일 때 미미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라고 말했고 , 그녀는 그걸 믿어줬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 신혼여행지에서 아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투로 ' 미미는 어떻게 됐어 ?' 라고 묻는다 . ' 알고 싶어 ?'' 응 '' 미미는 떠났어 .'' 책으로는 언제 나와 ?'' 글쎄 .'' 빨리 보고 싶은데 .'
그러나 민우에게 그 최애캐 망상 소설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 그가 강제로 비겁하게 완결을 냈으나 , 망상이 아닌 현실에서 다시 찾아온다 . 민우는 최애캐로 화한 미미가 아니라 진짜 미미 , 열일곱에 죽은 미미를 마음에 불러온다 . 죄책감이거나 미련이거나 . 엔딩 타이틀이 흘러가며 그는 아마도 그 진짜 미미인 것 같은 무언가와 대화를 한다 . ' 삶은 그런 것이다 ' 라고 멋부려 문장을 치고 있는데 , 그 사이로 소녀의 음성이 스며든다 . 망상 속에서 깨발랄하게 교과서읽기로 그에게 동경을 표하던 미미가 아니라 . 그가 한때 진짜로 알았고 진짜로 좋아했던 죽은 소녀가 . 아주 고요하고 스산한 음성으로 .
' 잘 있었어 ? 정말로 ( 나 없이 ) 잘 있었어 ? 어떻게 나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어 ! 고작 두달이었잖아 !'
' 당신에겐 고작 두달이었지만 나에겐 영원이었어 .'
망상 속에서 망상의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 난 잘 지냈어요 !' 라고 선언하고 , 망상 속의 쿨하고 지적인 소설가인 자신은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 지켜보았다 . 그러나 한때 현실이었던 미미의 기억을 만지는 그는 , 조금도 쿨하지 못하게 , 질투하는 연인처럼 추하게 ' 어떻게 나 없이 잘 지냈다고 할 수 있냐 ' 고 몸부림친다 . 그제야 죽은 미미가 살아있는 것처럼 .
이렇게 해서 죽은 소녀가 나오는 첫사랑 이야기는 완성되었다 . 슬픈 소녀순정소설에서 소녀가 죽으며 소년에게 ' 네가 많이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 ' 라고 감상적인 대사를 남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말로 . 비겁한 소설 속으로부터 잔인한 기억을 입고 현실로 걸어나오면서 . 그제야 민우는 자신의 열일곱살 그 시절이 죽어 사라졌다는 의미를 깨달았다 . 그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는 평생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자신이 불러낸 망령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갈 것이다 . 그가 망상소설을 쓰면서 겉멋들어 가짜 유령을 만들어내느라 그는 잊고있던 첫사랑의 기억을 너무 많이 되살려버렸고 , 바의 마스터가 날짜와 영화 이름까지 전부 암기하고 있던 것처럼 그것만을 복기하며 기억에 갇혀버릴 것이다 . 너무 노출이 심해 흰색만 남긴 영화 초반의 여름거리 장면처럼 , 그 기억만이 강렬하여 인생의 남은 부분을 전부 말려죽이고 퇴색시키며 .
소설을 위한 비겁한 소설 . 현실의 자신과 미완성으로 끝난 첫사랑 , 죽어가는 소설적 영감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 가공의 자신이 활보하고 유령이 나오는 소설 . 그러나 현실마저 집어삼킨 소설은 아마 기억의 무덤 .
음 , 마지막의 흐느적거리는 유행가와 함께 어울려서 정말 씁쓸하고 잔인한 첫사랑 이야기였던 것 같다 . 그래서 이 영화가 좋아졌다 . 그리고 희한하게도 이 알아먹기 힘들고 파편화되어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이 영화에서 강동원은 꽤나 자기 역할을 튀지 않게 충실히 해 냈다 . 때로는 영화의 창백한 배경이 되기도 하고 , 분열하는 카메라워크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 보는 사람의 충공깽 (...) 을 대변하는 비현실적인 얼굴도 되면서 . 엔딩 타이틀 올라가며 읊조리는 ' 잘 있었어 ?' 부분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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