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영반/테오도르하인리히/단편] 피그말리온(5) -完
드디어 완결.
(스포일러 주의)(스포일러 주의)(스포일러 주의)(스포일러 주의)(스포일러 주의)(스포일러 주의)(스포일러 주의)
테오도르의 표정을 보자마자 모니카는 자신의 작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니카는 테이블 앞에 앉은 채로, 테오도르는 문가에 우뚝 선 채로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빛을 등진 그의 얼굴은 이교도의 가면을 쓴 것처럼 그림자로 얼룩져 있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모니카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 한마디에 테오도르가 달리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모니카의 발치에 쓰러지듯 앉아 그녀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모니카는 테오도르의 뒤엉킨 흑발을 어루만져 주었다. 수백 수천번도 더 그러했듯.
"하인리히 때문이지?"
그렇게 묻는 모니카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내게 이런 목소리가 있었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가운. 테오도르는 그저 모니카의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구나.... 하인리히 때문이었어."
그녀는 공허하게 되풀이했다.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늘 다정하고 자신감 넘치는 테오도르의 웃는 얼굴 뒤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인리히의 그림자. 넌 모르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너희 둘이 닮은 것. 테오도르의 시선이 그 닮은 그림자를 좇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모니카는 더이상 알지 않으려 생각을 멈췄다.
그러나 이제는 멈출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 무언가 있다. 무언가 끔찍한 것이 모니카의 세상을 뒤집어 흔들었다. 모니카의 아랫입술이 경련하듯 떨렸다.
"너희는... 대체 뭐야! 하인리히는 네 형 아니었어?"
테오도르는 잡아달라고 애원하기라도 하듯 모니카의 손을 찾아 더듬었다. 그러나 모니카는 매정하게 손을 잡아뺀 후 등뒤로 감췄다. 고개를 묻은 채 테오도르의 음성이 억눌린 채 터져나왔다.
"최선을 다 했어! 하지만 말도 한마디 안 통하고 함께 자란 추억 따위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 형이라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잖아...."
깊은 곳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채 북받쳐 오른 음성. 처음 듣는 소리에 모니카는 움찔했다. 테오도르는 데인 듯이 길고 격렬한 신음을 악물었다.
어느날 불쑥 평온하던 일상에 이물질이 침입했다. 그 이후로 가족은 산산조각이 나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자기자신을 비난했다. '너도 결국 슐리만 핏줄이야. 그 인간의 자랑스러운 아들일 뿐이었어!' 지금도 귓가에, 가슴속에 쟁쟁 울리는 그 송곳같은 울림. 그럼 아버지의 아들인데 어쩌란 말인가. 그런 아버지를 선택한 건 어머니였으면서.
"그만큼이나 엉망진창이 됐는데.... 차라리 적으로 돌렸으면 편했겠지.... 그런데 그럴 수 없었어. 박살 나버린 가족을 인정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미움에 날 던지는 것도. 불가능했어...."
처음으로 띄엄띄엄 듣는 테오도르의 무방비한 고백에 모니카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언제나 영리하고 수완 좋게 자신을 방어하던 그가 아니다. 그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조용히 말해주었다.
"너도 겨우 열세살이었으니까."
그 음성에 이끌리듯 테오도르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늘 어른스럽게 굴었지만 아직도 소년을 못 벗어난 앳되고 잘생긴 얼굴 위에서 푸른 눈이 눈물에 젖어 빛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닿았던 그녀의 치마폭에도 눈물자국이 번져있다. 여전히 조용한 투로 모니카는 추궁했다.
"하인리히가 차 사고를 일으킨 건 들었어. 그거랑 관계 있어?"
"...그래."
"그가 떠나는 게 무서웠구나. 그렇지?"
"......그래."
"그럼 나는? 나도 그만큼 네게 중요해? 나는 네게 대체 뭐였지?"
테오도르가 입을 열려고 했다. 평소처럼 그 상냥한 음성으로 사랑한다고, 네가 전부이며 유일하다고 말하기 위해. 갑자기 모니카는 몸을 떨었다. 이제 충분하다. 충분히 짐작했으니 더 듣고 싶지 않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여전히 감정이 전부 빨려나간 듯한 목소리로 잘라냈다.
"그만. 아무리 솔직해도 조금도 기쁘지 않아. 네 다정함으로는 내 용서를 살 수 없어. 그렇지?"
눈물에 씻겨 이국의 하늘처럼 푸른 테오도르의 눈은 여전히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었다. 모니카의 등뒤에서 조금 전까지 간식으로 먹던 투명한 오렌지색 젤리와 금색 디저트스푼과 녹색 찻잔이 오후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너무도 평범한 풍경이지만 지금 이 순간을 경계로 모든 게 달라졌다. 모니카는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을 손수 닫아버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모니카는 손끝 하나 만져주지 않은 채, 자신의 발치에 꿇어앉은 테오도르를 단호하게 밀어냈다.
"시간이 필요해. 당분간 만나고 싶지 않아. 어쩌면 더 오랫동안."
하인리히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아직도 붕대를 두껍게 감은 오른손으로는 아무리 해도 넥타이를 맬 수가 없다. 계속 거울로 보이는 자신의 얼굴이, 유난히 더 새빨갛게 보이는 머리와 눈과 동양계 흔적이 엿보이는 광대뼈와 턱선이 신경에 거슬렸다. 몇번 망치다가 성질을 못 이겨 그는 넥타이를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망할, 꼭 이러고 가야 해?"
달칵 하고 자기 방에서 나온 테오도르가 바닥에 구르는 넥타이와 분해서 흰 얼굴에 더 주근깨만 도드라진 하인리히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혀를 쯧쯧 차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넥타이를 주워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너 정말 손재주 형편없다."
"시끄러워. 왜 개목걸이 같은 걸 차고 가야 하냐고."
"좀 현실파악 해라. 네 징계위원회다. 교장과 장학사 앞에서 예쁜 푸들처럼 꼬리치고 아양 떨어야 할 것 아냐. 그룬트슐레 과정만 겨우 홈스쿨링 수료한 채 길바닥에 내몰리고 싶냐?"
테오도르는 이미 말쑥하게 단장을 마친 채였다. 하인리히는 뭐라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테오도르가 목에 넥타이를 둘러감은 채 콱 조이는 바람에 혀를 깨물 뻔했다.
"이자식, 너 일부러...!"
"자, 봐라. 나름 괜찮아 보이지? 세상 최고의 모범생인 척, 누구보다 성실한 척, 구두 핥는 시늉이라도 하자고."
거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학생용 검은 정장을 키 큰 몸에 지나칠 정도로 말쑥하게 걸쳐입고 넥타이를 맨. 하인리히 혼자만 들여다볼 때는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던 풍경에 테오도르가 끼여들자 비로소 완성된 것만 같다. 흑발과 붉은 머리, 닮았지만 대조적인 푸른 눈과 붉은 눈. 비등비등하게 큰 몸집에 딱 들어맞는 새까만 재킷 차림 어깨가 서로 가볍게 맞부딪친다.
"어때?"
테오도르의 음성도 조금 들뜬 것 같다. 역시 함께 있어야 완전하지? 라고 묻는 듯. 하인리히는 자신의 옆모습을 집요하게 훑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처음으로 품었던 몸을 감정하고 재소유하려는 듯한 열기로. 하인리히는 도발하듯 비스듬하게 그 푸른 눈을 받아 흘렸다.
"엿 먹어."
완전히 자기 편이 된, 자기에게 묶인 자에게 던지는 야유. 테오도르는 피식 웃었다.
"너 목에 거즈는 왜 뗀 거냐?"
하인리히가 테오도르의 목 근처를 살피며 물었다. 희미하지만 아직 긁힌 자국과 딱지가 남아 다 나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테오도르는 손가락으로 그 위를 쓸어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내가 목에 칭칭 감고 나가서, 우리 형은 절 해칠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백번 말해 봐. 잘도 들어주겠다. 상처는 별것 아니라 벌써 나았다고 보여주는 게 낫지. 이 위에 파우더도 발랐다고."
"애쓴다, 참."
말은 퉁명스럽지만 하인리히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뻗어, 지도 위의 위도처럼 점점이 이어지는 테오도르의 상처 자국을 만져보았다. 그 손끝이 스치는 곳마다 뜨겁게 지지는 기분이 든다는 것은 혼자만의 비밀로 해야겠지. 솔직함도 다정함도 면죄부가 아니라고, 누군가가 가르쳐줬으니. 테오도르는 자신에 목에 댄 그 손등에 뺨을 부비듯 기대며 유쾌한 듯 중얼거렸다.
"그때 내가 다쳐서 다행이야. 아무 흉터도 안 남아도 넌 내 목을 볼 때마다 네가 빚진 것을 깨닫겠지."
"헛소리하지 마. 제정신 아닌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왜 아무도 그걸 모르지?"
"글쎄. 어쨌든 넌 싫어도 영원히 기억하겠지, 이 흉터를, 네가 내게 저지른 짓을. 결코 잊지 못해. 넌 그런 놈이니까."
그 사실이 난 기쁘다...라고 속삭이는 소리. 하인리히는 이를 꽉 물었다. "정신 나간 놈!"
설마 테오도르 이자식이 그때 일부러 피하지 않고 자기 목을 내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선명한 이미지가 하인리히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사방에서 울리던 비명, 흩뿌려지는 피, 붉은 피, 이복형제의 피.
한팔로 모니카를 감싼 채, 다른 한 손으로 목을 감싸고 놀란 눈을 파랗게 크게 뜨고 있던 테오도르. 그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곧 둑이 터진 듯 검붉은 피가 왈칵 넘쳐 흐르고.... 하인리히는 턱을 움찔했다. 일부러든 아니든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다시는, 다시는 테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자신 때문에 다쳐서 눈앞에서 피범벅이 되어 창백해져 가던 그 모습을 다시는…. '맹세할 수 있어?' 금발을 늘어뜨린 그 소녀가 머릿속에서 의심하듯 속삭인다. 하인리히는 히죽거리며 한없이 경박하게 대꾸했다.
"그래, 맹세해. 맹세하고 말고.”
징계위원회는 평일 수업 후 열렸다. 그래서 형제는 하교하는 학생들의 물결 틈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비슷한 큰 키와 몸집, 닮았지만 정반대의 색깔, 새까만 학생정장 차림의 그들은 싫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흘긋흘긋 돌아보고 자기들끼리 멸시하듯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벌집을 쑤신 듯 들려왔다.
"저런 것도 형제라고 감싸주고. 테오도르가 안 됐다."
누가 들으란 듯 크게 외쳤다. 하인리히는 고개를 쳐들고 낄낄대는데 테오도르가 낮게 내뱉었다.
"멍청한 놈!"
"열렬한 네 팬인가 보다. 그러고보니 네 제일 팬인 모니카는 어디 갔냐?"
테오도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몰라. 지금은 별 상관없어. 그보단, 한대 피울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기는 그의 한마디에서 많은 걸 눈치챘는지 하인리히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계속 그들을 흘끔거리고 수근거리며 지나치는 학생들 틈에서 그들은 멈춰섰고, 라이터 하나로 각자 담뱃불을 붙였다. 거울을 마주본 듯 담배를 문 한쌍의 콧날과 윗입술, 턱이 날카롭게 작게 빛났다가 사그라들었다. 테오도르는 먼저 길게 연기를 뿜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모니카는."
하인리히와 몸을 섞었지만, 그만큼의 대가를 모니카에게도 지불했다. 그녀의 발치에 모두 내던지고 눈물로 그녀를 자신의 잔인한 여왕에 즉위시켰지. 순전히 그녀를 향한 사랑만으로. 테오도르는 만족스럽게 다시 심호흡을 했다. 하인리히도, 모니카도 전부 머리칼 한올까지 내 것이다. 나만의 것이다. 모니카도 알아줄 것이다. 기다리다 보면 분명. 분명 그녀도….
테오도르는 반쯤 남은 꽁초를 던진 후 발로 짓밟았다. 그리고 왼손을 주머니에 찌르고는 오른손으로 자기보다 약간 큰 하인리히의 뒷머리를 애정을 담아 가볍게 움켜쥐었다.
"Bruder, 그러니 잘 하라고. 전부 끝내고 나서 우리 같이."
모니카를 기다리자.
피그말리온
"옛날 생각이라고?"
하인리히가 아무 감흥도 없는 목소리로 내뱉듯 되묻는다. 그러나 자신이 '옛날'이라고 입에 올린 순간 하인리히도 같은 기억을 떠올렸으리라고, 테오도르는 확신했다.
유난히 혼란스럽고 시끄럽고 수치스럽던 그 시절로부터 벌써 12년이나 지났다. 12년이나.......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하인리히가 혼자 독립해 나가 이 좁은 아파트에서 살아도, 테오도르는 자연스럽게 주말마다 벨을 누르든가 투덜거리며 주머니 속의 열쇠를 찾아서 마음대로 들어오곤 했다. 가끔은 딱딱한 소파에서 또 서로 안고 구르기도 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이대로 우리는 괜찮다, 그렇다고 테오도르는 생각했다. 얼마 전 하인리히에게 맡겨진 '타겟'을 보기 전까지는.
"맥주나 더 마셔라. 어차피 내일 아침에는 버려야 하니까."
"그래, 한병 줘."
불친절하게 코로나 한병이 날아왔고, 테오도르는 멋드러지게 그걸 허공에서 낚아채 캡을 비틀었다. 코로나라, 저놈 취향은 아닌데. 최근 데려온 놈팽이 흔적인가. 그러나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를 베를린의 놈팽이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아직 치우지 않은 방 한가운데의 노트북을 건드렸다.
그에 연결된 빔 프로젝터가 낮게 윙 하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온통 암막을 친 창가에 노트북에 담긴 흐릿한 사진이 슬라이드 재생되었다. 해상도가 낮아 유령처럼 떠도는 이미지들, 얼굴들, 아니, 하나의 얼굴.
케이스 넘버 TWR0023789-R. 이시문. 동양인 특유의 검은 직모와 얼굴형, 그러나 잠깐 흠칫할 정도로 그에게는 상식과 괴리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부자연스럽게 색이 빠져나간 오른쪽의 백발이며 원거리 사진으로도 이상할 만큼 또렷한 푸른 눈이. 처음 임무를 인계받고 이시문의 파일을 열었을 때 테오도르는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윤곽이 전부 날아간 사진만으로도 와 닿는 그 분위기. ‘이시문’이라는 미지의 인간. 왜인지 모르게 한참 홀린 듯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뒤늦게 하인리히의 등을 바라볼 정신이 들었다. 역시 이 임무의 핵심인원으로 자신이 불러온 하인리히는 다른 요원들보다 앞선 자리에 꼿꼿이 서서 팔짱을 낀 채 자료 슬라이드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과 어둠 속에 그 등을 쳐다본 테오도르는 천천히, 머리를 얻어맞은 듯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아마 후회하게 될 것이다.' 라고.
벽 한면에 가득 펼쳐진 어슴푸레한 이시문의 사진이 차례차례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테오도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너 혼자 파견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너 정말 그 발끈하는 성질 안 버리면 금방 타겟한테 들킨다."
"아, 그럼 네가 가던가. 싫다는 사람 억지로 엮어넣고 잔소리만 하고 있어."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내가 너처럼 귀신보는 눈이니 영능력이니 그런 액세서리 달린 것도 아니고. 칭얼대지 말고 착하게 플랜A 하고 있어. 나도 곧 따라가서 수 틀리면 플랜B로 투입될 테니까."
"잘나셨어, 정말."
하인리히는 코웃음치며 들고 마시던 맥주병을 날렵하게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둔탁한 유리병이 플라스틱 통 안에 부딪쳐 구르는 소리 속에서 어느새 테오도르가 다가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그 입술이 움직여 입꼬리를 눌렀다 떼자, 하인리히가 비죽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무슨 의미야."
"행운의 부적."
웃기고 있네, 라고 밀쳐버리려다 말고 문득 하인리히는 테오도르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이런저런 운동으로 뼈마디가 굵은 보기좋은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인리히의 붉은 눈에 멸시의 빛이 반짝였다.
"너 '약혼녀'는? 아직도 약혼반지 못 줬냐?"
"뭐, 알잖아. 고집센 거. 아직 차마 말을 못 꺼내겠네."
중얼거리며 테오도르는 이번에는 하인리히에게 좀더 깊게 입술과 혀를 들이밀고 입맞춤을 강요했다. 씁쓸함이 혀끝을 넘어 온몸 전체를 휘감고 돌았다. 그 근원은 심장에 있어 아무리 지워내도 끝없이 짙고 깊어지기만 하는 것처럼. 그래, 이제서야 후회한다.
이 임무에 널 추천한 것을. 내 손으로 널 낯선사람으로 꾸며 다른 자의 곁으로 보낸 것을. 내일이면 너는 12년 간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누군가가 되어 사라질 텐데.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어. 나와 같은 흑발과 푸른 눈을 보면서 너는 다른 이름을 부르겠지. ‘이시문’, 나의 대체품 ‘이시문’. 테오도르를 어느 낯선 언어로 번역하면 그 이름이 될까. 아니면 내가 하인리히 대신 그 이름을 부르게 될까. 어느 쪽을 향한 것인지 방향 모를 뜨거운 질투가 입안에 감돌았다.
"네 임무 안 망친다니까. 하인리히 슐리만 따위 완전히 지구상에서 없애준다고."
지긋지긋하다는 듯 하인리히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완전히 취한 듯이 머릿속이 어딘가 끊어진 채 그의 몸을 손끝으로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어떨까. 우리의 타겟, ‘이시문’의 몸은 너와 같은 감촉일까?’ 테오도르는 급하게 덮쳐오는 하인리히의 입술을 받으며 그의 등에 손끝을 세웠다.
"안돼, 그걸로 부족해. 임무를 마치면 다시 그 사람으로 돌아와라. 내가 알던 하인리히 슐리만으로. 그것까지가 내가 네게 맡긴 임무다.”
그 말을 끝으로 긍정도 부정도 않고 하인리히가 킬킬거리며 테오도르의 웃옷을 끌어당겨 그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머릿속이 모래로 가득 찬 것 같다. 꿈틀거리며 욕망에 차오르는 테오도르의 등근육, 12년 전 처음 서로 안았던 그날과 다름없는 그 몸을 어루만지며 하인리히는 성의없이 대꾸했다.
“노력해보지.”
지금은 그 대답만으로 됐다는 듯 테오도르는 눈을 내리깔았다. 너는 나의 완벽한 작품, 그리고 나 역시 너의—.
이시문의 회색 영상이 찰칵 찰칵 물속에서처럼 바뀌는 어둠 속에서 테오도르는 하인리히와 소파 위에 누웠다. 쓰디쓰게 웃으며 품속에 간직했던 약혼반지 한쌍을 테이블에 달칵, 올려두었다. 반지는 말없이 서늘한 은색으로 빛날 뿐.
[2017. 09. 07.] astor.
피그말리온(c) S.I.D. ending.
-- 모니카, 도망쳐!
-- 이시문도 도망쳐!!
-- 다음 시간에는 다시 망상잡담으로.
특영반 연성 리스트 : http://astorrr.tistory.com/101
계속 업데이트 됩니다.
특영반 옛날 그림 + 감상 블로그 : http://blog.naver.com/sleep_l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