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속 사진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바짝 세우고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 국적 독일, 생년월일 1983년 12월 29일. 하인리히는 피식 웃고는 여권과 도검소지증을 지갑 안에 잘 챙겨넣었다. 한숨 돌리려는 찰나 예고도 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차이니즈 딜리버리 왔습니다."
현관문 밖에 테오도르가 싱글거리며 서 있었다. 두 손은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하인리히는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안 사요." "그러지 말고 열어. 진짜 사오려고 했단 말이야. 근데 차를 대고 걸어갔다가 다시 걸어오기 너무 귀찮더라. 배달시키자, 배달."
그 뻔뻔함은 정말 따라가기 힘들다. 하인리히가 옆으로 비켜주자, 냉큼 들어선 테오도르는 선글래스를 벗으며 좁은 아파트 안을 휘 둘러보기부터 했다.
"꼭 해보고 싶었어. 총 겨눈 채 문 두드리고, 피자 배달 왔습니다, 하면 아무리 영화라지만 꼭 그걸 연단 말이지. 아, 그렇다고 지금 내가 총 겨누고 있단 소린 아니고. 짐은 다 싸셨습니까, 슐리만 요원? 혹시 모르니 여기도 깨끗이 정리해야 하는 거 알지? 혹여나 BND하고 네 연결고리가 되면 안 되니까." "거 정직원이라 거들먹거리긴. 클리너 불러놨다. 서류정리는 이미 끝났고. 머리카락 한올 안 남길 테니 잔소리 그만 해."
하인리히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좁고 살벌할 만큼 아무것도 없는 아파트 안을 거닐다가 테오도르는 책상 위에 둔 지갑을 열었다. 여권을 펼쳐보고는 못마땅한 듯 입가를 비틀었다.
"이름 취향 한번...." "편한 대로 하라며. 어쨌든 본명만 안 들키면 되잖아."
하인리히는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욕실에서 꺼내온 칫솔과 향수병과 면도기를 전부 비닐에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그새 테오도르는 반쯤 닫혔던 트렁크를 열어보고 신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너 진짜... 기어코 할 거냐? 일본 가운 진짜 입을 거야? 미친 놈아." "확실하게 인상 심어주라며. 경찰에게 야쿠자 컨셉만큼 강렬한 게 또 있어? 아마 꿈에서도 나올 거다." "너 지금 쪼잔하게 반항하는 거지? 무리하게 일 시켰다고 아주 엿먹어봐라 이거네." "알면."
한걸음에 성큼 하인리히의 얼굴이 닥쳐왔다. 코가 맞닿을 거리에서 시선이 덤벼들고, 억센 손이 테오도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는 찡그리듯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닥치시지. 그만 까불고."
테오도르는 뻔히 하인리히의 두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멱살을 쥐인 채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런 캐릭터야? 좋아, 못한다고 난리치던 것보다 훨씬 낫네. 그렇다고 너무 자주 성질 드러내진 말고."
언제나 그랬듯이 가볍게 하인리히의 분노를 흘려보내고는, 그의 손아귀에 주름진 옷깃을 탁탁 털었다. 하인리히는 금방 찬물을 맞은 듯 가라앉아서는 고개를 휙 돌렸다. 테오도르 쪽을 보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꺼지래도 안 꺼질 거지? 그래, 뭐로 할 거야?" "차우멘하고 쿵파오 치킨. 새우도 먹을래?"
그 손에 핸드폰을 건네주며 테오도르는 비닐로 덮어둔 소파 위에 털썩 늘어져 앉았다. 하인리히의 핸드폰은 임무가 결정나던 바로 그날 테오도르 손으로 회수해서 처분했으니까. 하인리히는 한손을 허리에 얹고 어깨를 깊숙이 수그린 채 방 저쪽으로 걸어갔다. 통화음질이 안 좋은지 집중하듯 머리를 좌우로 조금씩 흔드는 동안 커다란 등줄기가 단단히 긴장되어 있는 게 보였다.
테오도르는 소파에 깊이 파묻힌 채 하나하나 뜯어보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한동안 볼 일 없을 뒷모습이다. 자신의 단골 테일러에서 맞추게 한 심플한 셔츠, 소매를 접어올려 드러난 팔뚝까지 휘감은 문신, 이번 임무를 준비하는 동안 좀더 길어진 빨간머리 틈새로 겨우 보이는 두툼한 목의 윤곽. 테오도르는 피곤한 듯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잘 해, 하인리히. 2년 넘게 공들인 프로젝트고 넌 그 핵심이다. 2년이나 걸려 이 프로젝트만을 위해 내가 널 세공하고 다듬어냈어. 저 여권 속에 든 남자야말로 내 작품이다. 그 이후는 네 몫이지만 오늘까지는, 오늘밤까지는 내 이름을 건 내 작품이야.
문득 피그말리온이 머릿속을 스쳤다. 테오도르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가 만들어낸 것을 사랑하게 되다니 그런 얼간이는 사양이다. 자기자신을 직시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겁쟁이나 할 수 있는 짓이지. 방 건너편에서 통화를 마친 하인리히가 핸드폰에 묻은 자신의 지문을 지우며 걸어오고 있었다.
"먹고 바로 꺼져." "싫은데? 바쁜 일 제쳐두고 일부러 찾아와줬는데 되게 박대한다?" "아 늬 프로젝트 안 말아먹을 테니까 좀 냅두라고." "누가 프로젝트 때문에 그런대?"
테오도르는 핸드폰을 내미는 하인리히의 소매를 움켜쥐고 그대로 자기 쪽으로 끌어들였다. 균형을 잃고 그 거대한 덩치가 자신에게로 무너져내렸다. 하인리히는 순간 남은 한팔로 소파 윗부분을 붙잡고 한쪽 무릎을 테오도르의 허벅지 옆에 대 겨우 몸을 추슬렀다. 하인리히의 두 눈에 당황한 표정이 스치는 걸 테오도르는 즐기듯 지켜보았다. 그래야지, 내가 나쁜 장난을 걸어도 넌 내가 다치지 않게 그것부터 신경써야지. 하인리히가 진짜로 폭발하기 전에 테오도르는 얼른 움켜쥔 손을 놔주었다.
"좋아좋아, 제대로 긴장하고 있네." "너 이자식...." "고맙다고 해야지? 너 혼자 있으면 불안해할 게 뻔하니까 일부러 온 거라고.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설마 널 안 믿겠어?" "그게 그 소리잖아. 빌어먹을."
하인리히는 테오도르의 두 어깨를 소파 등받이에 쿵 밀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 앞에서부터 손바닥으로 쓸어넘겨 앞머리를 정수리 쪽으로 한참 누르고 있다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두 팔을 휙 뿌리쳐 내렸다. 한결 침착해진 눈빛으로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걱정 마라. 하인리히 슐리만 따위 깨끗이 지워줄 테니. 그런 인간 내일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 했던 것, 두번은 못 하겠어?"
테오도르는 약간의 흥분 같은 것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오늘 혼자 있고 싶지 않았던 건 자신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깨달으며. "왜 기분 더럽게 웃어?" 하인리히가 소파 곁으로 다가오자 털썩 앉도록 옆으로 자릴 내주며 테오도르는 자기가 웃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테오도르는 눈을 반쯤 감으며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옛날 생각 나서."
갓 면허를 땄던 봄,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학교를 제외하고 테오도르가 제일 자주 차를 몰고 간 곳은 시내 곳곳의 경찰서였다. 그날도 테오도르는 차를 아무렇게나 세운 후 경찰서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인리히 슐리만의 동생? 성인 보호자는 없습니까?"
어김없이 듣는 소리에 테오도르는 잠자코 핸드폰을 꺼내들었고 전화를 건 다음 경찰관에게 내밀었다.
"저희 아버지와 통화 하시겠어요?"
미심쩍게 핸드폰을 받아든 경찰관은 저편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표정이 굳었다. 아니, 곤란합니다, 라고 몇번 반복한 후 그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통화를 마쳤다. 부하직원을 불러 뭐라뭐라 지시한 후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눈앞에 선 말쑥한 흑발소년을 뜯어보는 눈초리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도 테오도르에게는 익숙한 지 오래였다.
"그럼 너희가 그... 음, 여튼 알겠다. 아버지가 곤란하실 테니 이번은 눈감아주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해라.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기 싫으면." "그럼요. 심려 끼쳐드려 죄송하게 됐습니다. 다신 그러지 않을 거라 약속드리죠."
테오도르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밉지않게 싱글거리는 자신의 얼굴이 타인에게, 특히나 자신의 성을 듣고 난 경찰공무원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인상과 신뢰를 주는 능력은 원래 타고났으나 망할 놈 하나가 인생에 끼여들고 난 후 더욱 갈고닦여 이젠 경지에 올랐다.
"하인리히!"
저편에서 경관에게 이끌려 걸어오는 그림자를 보고 테오도르는 유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이 재회한 곳이 경찰서가 아니라 콘서트장이나 클럽이라도 된다는 양 가벼운 태도였다. 잽싸게 다가간 테오도르는 자연스럽게 경관의 손에서 이복형을 끌어와 이리저리 살피는 시늉을 했다.
일부러 부산떨면서 그대로 밖으로 데려가려 했는데, 덩치 큰 경관 하나가 불쾌한 듯 툭 던졌다.
"너, 무슨 약 했냐?"
그제야 하인리히가 고개를 들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불그스름한 눈으로 말없이 경관을 쏘아보았다. 전화를 받았던 경관이 동료를 말렸다.
"그만해. 어릴 땐 술먹고 실수도 하는 거지." "저게 술먹은 놈이야? 머리 흔들면서 중얼중얼하고 헛소리하는게?" "하하, 뭔가 오해하셨나 보네요. 그런 거 안 합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가뜩 위축된 하인리히가 또 울컥해서 날뛰기 전에 테오도르는 냉큼 그를 잡아끌고 나왔다. 차문을 열고 조수석에 던져넣자마자 "벨트부터 해!" 소리지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하인리히는 있는대로 좌석을 뒤로 젖히고 거의 눕다시피 하더니 두 팔을 목 뒤로 돌려 머리를 괴었다. "음악." 꺼칠한 목소리로 한마디 하자, 테오는 망할 놈 하고 중얼거리며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더 크게, 속삭이는 소리. 곧 작은 차 안에 터질 듯이 롤링스톤즈가 쾅쾅 울려댔다.
두세 곡이 지나간 후에야 겨우 마음이 풀렸는지 하인리히가 뚱하게 글로브박스에 다리를 올렸다. 테오도르는 기어를 바꾸면서 손으로 그 무릎을 힘껏 때렸다.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하인리히가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내뱉았다.
"'너 무슨 약 했냐?'" 쿡쿡 웃으면서 테오도르가 말을 받았다.
"'머리 흔들면서 중얼중얼거리고 헛소리 했잖아.'" "'쟤들이 걔들이야? 슐리만 치안감 아들들? 밖에서 낳아왔다는 망나니가 저놈이야?'" "'그래, 귀신 본다는 그 미친 녀석!'"
둘은 동시에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이젠 둘이 즐겨 하는 놀이가 되어버렸다. 하인리히는 그제야 다리를 글로브박스에서 내리고는 코웃음쳤다.
"약 안 합니다~ 망상도 환각도 아닙니다아~" "귀신 보는 건 맞습니다아~"
신호가 바뀌자 천천히 액셀을 밟으며 테오도르가 흥얼거렸다. "허리 다친다, 하인리히. 똑바로 앉아." 투덜거리면서도 좌석을 바로 세우고는 하인리히는 핏기없는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테오도르가 물었다.
"그래서, 이번엔 뭐였는데. 기물파손? 뒷골목에서 쓰레기통 부수고 불냈다며? 또 그거 본 거야?" "어. 자꾸 이상한 곳으로 끌고가며 깐죽거리길래 화가 좀 났는데.... 불꽃이 멈추질 않아서." "그러게 욱하지 말랬지." "이이상 뭘 더 어쩌란 말이야!"
하인리히가 주먹으로 차문을 한대 쿵 쳤다. 테오도르는 대수롭잖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른 덜 됐나보다. 상담선생들 죄다 사춘기 문제라 나이들면 가라앉는다더니." "돌팔이들이 뭘 알아. 젠장." "뭐 그래도 옛날보단 나아졌잖아. 진정해. 그놈의 능력만 좀 얌전해지면 좋을 텐데... 좀더 두고 봐야지." "자기 일 아니라고 막 말하지."
말투와는 달리 하인리히의 표정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이 혼혈 이복형제가 의외로 컨트롤 가능하다는 사실이 테오도르는 가장 신기했다. 자신이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당겨온다. 내가 뭔줄 알고 그렇게 고삐를 넘겨주나 싶었지만 뭐 상관없었다. 이런 귀찮은 짐덩이를 떠맡았는데 컨트롤마저 안 된다면 진작 내팽개치고 어머닐 따라 떠났겠지. 테오도르는 신호에 걸려 차가 다시 멈춘 새 몸을 틀었다. 불쑥 고개를 내밀어 하인리히의 두 눈을 바로 코앞에서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참 이상하네. 똑같은 사람 눈인데 뭐가 다르지. 응?"
눈을 들여다보면 싫어하는 짐승. 붉은 돌의 파편같은 날카롭고 예민한 빨간 눈이 숨을 들이키듯 커졌다. 하인리히는 싱글거리며 자길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눈에 당혹해서 또 화를 내려는 듯했다. 테오도르는 때맞춰 몸을 슥 빼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지금도 보여? 나한테도 뭐 있어? 응?"
"그래, 붙었다. 아주 끔찍한 여자 귀신이 쌍으로 늬 어깨에 타고 있다. 여자 조심해." "하하하, 내가 참 여기저기서 많이 사랑받지. 응, 그래. 아무것도 안 붙었다는 걸로 알고 안심할게."
이번엔 하인리히가 몸을 움직였다. 아주 조용하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운전하는 테오도르의 옆얼굴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그리고 속삭였다.
"...웃기지 마. 내가 죽으면 꼭 늬놈에게 들러붙을 테니...."
너무나 감정을 억누른 희미한 목소리라 테오도르는 어깨를 흠칫했다. 잠깐 얼어붙은 침묵. 롤링스톤즈를 압도하는 냉기. 그러나 그의 질나쁜 장난에 일일이 반응할 만큼 테오도르도 무르진 않았다. 그렇다면 젠장, 이 망할 자식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 테오도르는 하인리히가 싫어하는 클래식 채널로 돌리며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 몸 비싼 거 알지? 눌러붙을 거면 로터리 당첨번호 같은 거 물어오기다." "제발 입 좀 다물어."
테오도르는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고는 핸들을 꺾었다. 묘하게 가슴이 차가웠다. 그 붉은 눈이 정말 저주받은 양 언제까지나 가슴 밑바닥을 건드리는 듯이. 먼저 죽든 말든 상관없다. 하지만 내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죽을 수 있는 놈이 아니지. 반쯤 열린 입술 새로 너덜너덜한 우월감이 숨결에 섞였다. 네놈은 겁쟁이라 그러지도 못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