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안쪽이 쿡쿡 쑤셨다. 하인리히가 눈을 꽉 감았다 뜨기를 반복할 때마다 눈꺼풀 안쪽에 선명한 불꽃의 잔상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나쁜 징조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수업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눈을 찌르는 감각은 점점 더 강해지고 이젠 코 속에 축축하게 젖은 불쾌한 냄새마저 나기 시작했다. 점점 더 머리를 크게 흔들자 뒷자리 학생이 기분나쁜 듯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아, 젠장. 하인리히는 욕지기를 삼켰다.
역시나 '그게' 시작됐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겹치는 순간. 교실 구석이나 천정에 원래 없던 거무스름한 곰팡이 자국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것들은 괜찮아, 이미 오래 전에 썩어 문드러진 찌꺼기 같은 것들. 무로 돌아가는 중이라 더이상 해가 되지도 않는다. 문제는 '그놈'이다.
하인리히는 최대한 옆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오른쪽 시야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무시했다. 딱 사람 크기 정도에 삐죽 솟은 모가지와 팔도 달린 것이 그의 곁에 앉아있다. 대체 언제부터? 하루종일 따라다녔나? 아니면 지금 막 보이면서 불러들였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땀이 흘러내렸다. 하인리히는 온몸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모르는 척 해라. 안 보이는 척 해. 들키면 안 된다. 놈이 보인다는 걸 들키면 안돼...!'
"그래서 이 2차방정식의 수식은...."
하인리히는 샤프펜슬을 쥐고 자연스럽게 필기도 하며 수업내용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러나 계속 오른편 시야에 놈이 흔들거리는 게 신경쓰였다. 그놈은 움직이고 있다... 깨닫자마자 하인리히는 혀를 깨물 뻔했다.
놈은 하인리히의 움직임을 똑같이 따라하고 있다. 그가 필기하면 놈도 손을 움직이고, 다리를 꼬면 시커먼 놈의 하반신도 움직였다. 놈의 엄지손가락이 미친듯이 위아래로 까딱거린다....
"슐리만! 그 소리 좀 그만두거라."
교사의 목소리에 하인리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자신이 샤프펜슬의 꼭지를 미친듯이 달칵달칵 눌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놈이 비웃는 게 느껴지는 순간 하인리히는 불에 덴 듯 샤프를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누군가의 비웃음을 들으며 하인리히는 샤프를 줍기 위해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찢어지는 듯한 신음을 삼켰다.
길고 더러운 머리칼이 바닥에 해초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부릅 뜬 새빨간 동공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 눈도 머리칼도 거꾸로 뒤집힌 채였다. 놈은 좁은 책상 아래 틈에 거꾸로 선 채 하인리히를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자, 여기.'
더러운 냄새가 나는 손가락이 하인리히의 샤프를 쥐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들키지 않게 얕게 숨을 들이키고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더듬거리며 샤프를 찾는 척하기 시작했다. 표정을 유지하며 그 썩어가는 손을 스치기까지 했으나 결코 샤프에는 손대지 않았다. 귓가에 후끈한 바람과 함께 쿡쿡 웃는 웃음소리가 지나갔다.
'영악한 것.'
놈은 그대로 사라졌다. 하인리히는 방심하지 않고 조금 더 여기저기 둘러보는 시늉을 한 후 침착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미 아무도 그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새 필기구를 꺼내 필기를 계속하는 동안 눈의 통증과 악취도 천천히 사라져 갔다.
수업 끝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손바닥 안에 차가운 땀이 흥건했다. 하인리히는 손가락을 모아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가슴 속에 서늘한 것이 지나간다.
'괜찮아, 정 안 되면 최후의 수단이 있어.'
꽉 움켜쥔 손아귀에 손톱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힘을 쓰면 돼.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어.'
물론 그걸 쓰게 되면 대가로 뭘 내주게 될 지 모른다. 지난번에는 열세살까지 살던 나름 평온하던 삶이 박살났지. 하인리히는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면 될 거 아냐. 내가 그놈을 찢어발기든 죽이든. 특히 귀찮은 녀석이 알지 못하게...."
테오도르에게 괜히 말했다. 순조롭게 살던 도련님이 자극적인 장난감이라도 찾은 듯이 보호자 행세를 해 대며 끈질기게 구는 게 귀찮기 짝이 없다. 다 지긋지긋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번에는 진짜 두통이 올 것 같아, 하인리히는 백팩을 메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쳤다. 벌집을 쑤신 듯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학생들 틈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다. 문득 그는 얼어붙은 듯 자리에 굳어 섰다.
테오도르가 보였다. 복도 저편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 모습이, 웃는 옆얼굴이 인파 사이에서 언뜻언뜻 보이고 있다. 갑자기 하인리히는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잔뜩 일그러뜨렸던 얼굴 근육이 풀리며 자기도 모르게 안심한 표정이 됐다.
그는 모니카의 손을 잡은 채 뭐라고 다정하게 대화를 하며 걸어오는 중이었다. 하인리히는 멈춰선 자리에서 하염없이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절실할 만큼 그들의 모습에서 위안을 찾으며. 그러다 하인리히는 그들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으며, 아는 척을 하거나 모른 척 돌아서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손가락이 경련하듯 가볍게 꿈틀거렸다. 하인리히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테오...!"
목소리가 혀뿌리에서 말라붙었다. 훅 커진 두 눈에 시커먼 잔상이 스쳐갔다.
그놈이 테오도르 뒤에 서 있었다. 철사처럼 뻣뻣하고 더러운 머리칼로 뒤덮인 놈이 테오도르 어깨 너머로 하인리히와 눈을 마주치며 씩 웃었다. 귀밑까지 찢어지는 새빨간 입보다도 그 손가락에 시선이 달려갔다. 그놈이 하인리히의 샤프펜슬을 움켜쥐고 있다.
놈이 하려는 짓을 깨닫자마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하인리히는 백팩을 내던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놈이 히죽거리며 테오도르의 목을 향해 샤프의 끝을 내리찍고 있다.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떠밀치며 하인리히는 고함 질렀다.
"테오도르!"
손끝이 달아올랐다. 붉은 기운...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그 꺼림칙하고 불길한 힘이 느껴지고 있다. 테오도르가 퍼뜩 고개를 들어올리는 게 보였다. 그가 반사적으로 모니카를 끌어안는 모습이 스쳤고, 놈은? 놈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테오를 건드리지 마!"
테오도르의 목 근처에 빛나는 선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신을 잃을 것처럼 하인리히는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 힘으로 가득 찬 손아귀를 휘둘러 놈의 새카만 몸통을 갈랐다. 요란한 굉음, 그리고 누군가 지른 비명이 뒤늦게 퍼졌다.
손은 비어 있었다. 평범한 손이다. 하인리히는 허벅지 위에 늘어뜨린 두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써 해가 졌는지 사방은 캄캄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한낮과 다름없이 자기 두 손을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지독히도,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발목에 올가미가 걸려있는데 그게 점점 조여드는 걸 자기만 모르던 기분이다.
'다 알면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은 전부 다 아는 주제에 모르는 척. 넌 여기서 평생 못 빠져나가.' "닥쳐."
하인리히는 별로 화도 내지 않고 내뱉었다. 저 목소리의 주인이 놈인지, 다른 잡것인지, 아니면 자기자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으로도 벅찼다.
"저거 완전히 돌은 놈 아냐? 자기 동생을 덮쳤다며?" "본 애들이 그러는데, 동생 보자마자 완전 눈 뒤집고 달려들었다네." "어릴 때 일본에서 살았단 것도 거짓말 아냐? 어디 들어가 있다가 나온 거지?" "귀신 보인다는 소문 있던데. 크크, 엑소시즘 받고 그런 거?"
하마터면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도 놓칠 뻔했다. 어차피 못 들을 거라 생각했는지 상대가 문을 벌컥 열고, 거실의 불빛과 함께 들어왔다. 테오도르였다.
"뭐해? 불도 안 켜고 깜깜한 데서 궁상이냐?"
습관적으로 스위치를 누르려다 말고 테오도르는 손을 거둔 후, 하인리히 앞으로 느긋하게 걸어와 섰다. 하인리히는 침대 끄트머리에 겨우 걸터앉은 채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꺼끌대는 목소리가 나왔다.
"왜 왔어. 구경났냐?" "삐딱하긴. 그래, 어떤 꼴인지 구경 왔다. 옆에 앉는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하인리히 옆에 몸무게 전체를 실어 털썩 주저앉았다. 팔을 뒤로 짚고 천정을 올려다보는 그의 목을 둘러 거즈와 붕대가 덮여있는 게 얼핏 보였다. 입안이 모래사막처럼 바싹 말랐다.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 물었다.
"...네 여자친구는?" "오, 걱정해 주는 거야? 네가 남 생각하는 거 처음 본다. 너 하인리히 맞아?"
한대 때릴까 하다가 그럴 기운도 없어서 하인리히는 꽉 쥐었던 손가락을 도로 힘없이 풀었다. 테오도르는 붕대 감긴 목을 옷깃을 세워 새삼 가리며 말을 이었다.
"어, 괜찮아. 좀 놀란 것 뿐이야." "...남자친구 형이란 놈이 흉기 들고 달려들었으니 당연히 놀랐겠지." "남들 눈에는 역시 그렇게 보이려나."
테오도르가 혀를 찼다. 평소처럼 태연하게 재잘거리지만 역시 그의 어깨도 단단히 굳어있는 것을, 하인리히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도와준 거 맞지?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된 거야? 또 귀신 짓이야?" "귀신...."
무심코 대답하려다 하인리히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입가가 뒤틀렸다.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받고 올라 하인리히는 되는대로 내뱉었다.
"말해봤자 믿겠어? 넌 보이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하는데 내 말만 들어서 무슨 소용이야. 내가 이상한 짓 할 때마다 일일이 착하게 고개 끄덕여주려고? '그래, 귀신 때문이지, 나도 다 알아.' 알기는 개뿔!" "그럼 뭐야. 내가 안 보이고 못 느끼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사실을 알 자격도 없다고?"
테오도르의 목소리 속에 뭔가가 들어있었다. 하인리히로서는 거의 처음 접해보는 감정.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노 같기도 하고 서운함 같기도 한. 차마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어서 하인리히는 계속 고집스럽게 어둠 속에 희끄무레한 자기 손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다쳤는데도? 나와 상관없는 일에 말려들어서 다치고, 너까지 오해 받잖아. 그런데 아직도 나한테 자격이 없어? 그럼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뭐가 부족해. 난 네가 빌어먹을 이복형이란 이유만으로 터무니없는 귀신이니 뭐니 하는 소리 진지하게 듣고 믿으려 노력이라도 하잖아. 넌 뭘 했어? 뭘 하고서 맘대로 날 밀어내니 마니 결정하냐고!"
단숨에 쏟아내는 테오도르의 말들이 하나하나 묵직한 돌덩어리처럼 하인리히의 심장을 후려치고 갔다. 멍이 들 만큼 쓰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속에서 비난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테오도르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윤곽인 하인리히보다는 좀더 윤곽이 단단하고 호감형인 그 얼굴. 울컥 치민 감정을 겨우 눌러 삼켰는지, 테오도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알아 쳐먹었으면 이어서 하자. 그래서 귀신이." "...귀신이...." "나를." "너를." "뭘 어떻게 한 거야?" "...널 공격하려 했다. 내가 수업시간에 떨어뜨린 샤프로, 목을 찌르려고."
테오도르가 길게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뜨겁다는 듯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는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이제야 좀 알겠네. 그래서 네가 그걸 공격했고, 샤프 끝이 찌르는 대신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지?" "그래." "네가 먼저 달려들었고, 귀신은 안 보이고, 내 목에는 상처가 생기고, 샤프는 현장에 떨어져 있고, 게다가 근처 사물함이 찌그러지고 그을렸으니 남들 보기엔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네. 사물함은 어떻게 된 거야?" "내 힘...의 일부야. 불길 같은 것. 뭔가를 물리적으로 부수거나 가를 수도 있는 모양이야." "정말 골고루 한다."
오늘치 학습분량을 넘어섰다는 듯 테오도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인리히는 가만히 앉은 채 이제 알 건 알았으니 테오도르가 일어나서 나가주기를 바랐다. 빨리 혼자 잠들어서, 산 자도 죽은 자도 자기자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 잠기고 싶었다. 단 혼자서, 가능한 오랫동안. 그러나 테오도르는 여유있는 몸짓으로 아예 뒤로 한껏 누워버렸다.
"너 지금 또 걱정하지? 대충 얼버무려 놨으니까 걱정 마." "뭘." "네가 며칠 불면에 시달려서 좀 신경이 날카로웠다, 샤프로 날 찌를 의도는 없었다, 우린 잠깐 몸싸움을 했을 뿐이다. 사물함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누가 폭죽을 가져온 모양이라고 둘러댔지." "직접 본 눈이 몇인데 잘도 통하겠다." "어쩔 거야. 이번에도 적당히 아버지 이름 깔고 뭉개면 흐지부지 되겠지. 몹쓸 부친이니 이름 팔리는 정도야 참아줘야지." "너 진짜...."
머리통이 낙천적으로 생겨먹은 거냐, 너무 온실 속에서만 커서 최악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거냐. 하인리히는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아니면 대범한 거물이거나. 하인리히는 격심한 혼란을 감추려는 듯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나.
"됐다. 피곤해." "나도 피곤하다." "잘 됐네. 네 방으로 꺼져."
하인리히는 그를 무시하고는 드러누워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썼다.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은 기분으로 이불 속에서 길죽한 몸을 작게 구겨서 무릎을 끌어올렸다. 사라지지 않는 불안. 목구멍까지 땅 속에 파묻혀서 숨쉴 때마다 갈비뼈 틈으로 진흙이 빨려들어 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후, 하고 테오도르가 한숨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맘대로 오라가라야."
털썩 하고 매트리스가 크게 흔들렸다. 상체만 누워 있던 테오도르가 온몸을 던지면서 하인리히의 발을 깔아뭉개는 바람에 하인리히는 고함을 쳤다. "망할 자식아!"
그러나 하인리히는 더 이상 테오도르를 쫓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이불을 쓴 채, 옆에 바짝 붙어 누운 테오도르의 몸을 등으로 느끼고 있었다. 원래는 테오도르가 사춘기가 오기 전에 쓰던 침대라 둘이 함께 누워있기엔 터무니없이 좁았다. 옆으로 누워 등지고 있다고는 해도 하인리히는 그의 호흡 하나하나, 들썩이는 옆구리의 선까지 전부 전해받았다.
"...괜찮냐?"
하인리히가 낮게 물어온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테오도르는 굳이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더듬어서, 몸 앞쪽으로 돌리고 있던 하인리히의 손을 찾아냈다. 그대로 가볍게 끌어당겨 자신의 목으로 가져왔다.
테오도르는 가만히 그 손에 자신을 내주었다. 다친 곳을 더 건드릴까봐 겁내듯, 머뭇거리며 손가락이 슬쩍 슬쩍 붕대 위를 어루만지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며. 뼈마디가 불거져 길고 강하고 분노로 가득 차 보이는 손가락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자신을 목졸라 죽일 수도 있는 손이라고, 테오도르는 희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목을 조르는 대신 그 손은 계속 테오도르의 목을 쓸어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투르지만 점점 더 부드럽게. 거즈로 두툼하게 덮은 상처 위를 지날 때는 쾌감에 가까운 짜릿한 작은 통증이 일었다. 테오도르는 그만하라는 듯 그 손가락 끝을 쥐었다. 그리고 반쯤 충동적으로 하인리히의 손가락을 입속에 넣고 깨물었다.
"알겠지? 별거 아냐."
별 거 아닌데 사람들이 법석 떠는 게 더 재미있었지. 테오도르가 하인리히의 손가락을 문 채 웃음에 섞어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말했다. 하인리히는 진저리를 쳤다. 저놈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지 안 봐도 뻔하다.
잘생긴 어린 성자처럼 싱글거리는 얼굴을 하고는, 치료받는 동안 능란하게 아무도 안 믿을 거짓말을 하고 있었겠지. 자기 이복형에게 습격받아 피가 철철 나는 목을 한 채 그 형을 감싸주는 녀석인 척하며. 하인리히는 코웃음을 쳤다.
"형하고 형제싸움 좀 했다, 라. 물론 그 형은 귀신도 보고 정신도 좀 나갔다는 소문이 있지만, 단지 잠을 좀 못 잤을 뿐... 그따위 웃기는 거짓말, 누가 믿겠냐? 하긴, 믿든 말든 네가 손해볼 건 없군. 네 평판이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내 편만 아무도 없어질 뿐." "원래 없었잖아, 그런 거." "그래, 덕분에 확실히 고립됐어. 기분 좋아?"
테오도르는 무관심하게 맡기고 있던 하인리히의 손을 잡아 이번에는 자신의 얼굴로 가져왔다. 그 손바닥에 뺨을 쓸어보며 어른이 아이를 달래는 투로, 그렇지만 어딘가 삭막하게 말했다.
"우리 둘 다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어. 기분 따윈 중요하지 않아, 하인리히. 내가 널 지켰다는 게 중요하지."
등돌리고 누워있던 하인리히의 입에서 하, 하고 비웃음 같은 게 터져나왔다. 갑자기 박차듯 일어난 하인리히가 손을 뻗어, 조금 전까지 테오도르의 뺨에 대고 있던 그 손에 힘을 주어 턱을 콱 움켜쥐었다. 어둠 속에서 문밖의 희미한 불빛만 받아 하인리히의 두 눈이 벌겋게 번쩍였다.
"Fick dich!" "욕 할 땐 정말 발음 끝내준다니까."
테오도르가 킥킥 웃었다. 목을 다쳤다고 차마 멱살도 못 쥐는 나약한 마음을 한 내 반쪽 혈육. 테오도르는 하인리히의 뒷머리로 손을 가져가 쓰다듬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테오도르의 턱을 움켜쥐었던 하인리히의 손이 저절로 풀렸다. 테오도르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알아, 날 도우려고 했던 거지? 그 귀신이란 게 날 해칠까봐. 나도 그래. 나도 널 도운 거야. 앞으로도 계속 네 편이야."
그리고는 하인리히가 피하지 못하도록 목덜미를 꽉 움켜쥔 채, 꽉 이를 악문 듯한 입가에 자신의 웃는 입술을 가져다댔다. 고집스러운 입술 위를 놀리듯 혀로 쓸며 몇번 입맞췄다. 그의 높아지는 숨소리와 웃음 때문에 하인리히의 어깨까지 흔들렸다. 뚫듯이 반쯤 밀려들어온 혀를 받아들이며 하인리히가 내뱉었다.
"진짜 싫은 놈." "나도 너 싫어." "개자식."
언젠가 둘이 마리화나를 잔뜩 피우고 처음으로 한 침대에 뒤엉켜 잤던 날 이후, 가끔씩 치는 장난이었다. 서로의 몸을 갖고 치는 장난. 아버지의 몸을 나눠 가진 가장 가까운 타인의 맨몸에 대한 호기심. 서로 취한 상태에서 만져보고 핥거나 입맞춰보고 조금 깊은 애무까지 가는. 그러나 미리 그어둔 선은 넘지 않는.
취했다는 핑계도 댈 수 없는 지금은 탐욕스럽고 분풀이하는 듯한 키스 몇번으로 끝났다. 오래 맞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서로의 어깨며 팔을 움켜쥐었던 손이 멀어졌다. 그들은 말없이 침대에 누웠다. 다시 처음처럼 벽을 보고 옆으로 누운 하인리히의 등을 감싸듯 테오도르의 가슴과 어깨가 밀착해왔다. 그렇게 뒤에서 끌어안고 안긴 채 그들은 눈을 감았다.
불안한 아이들의 둥지였다. 가장 약한 바람 한줄기, 어미새의 날갯짓 한번으로도 흩어져 사라질 지푸라기 둥지. 그러나 테오도르는 하인리히의 마르고 굳은 어깨를 소유하듯 움켜쥐고는 고개를 파묻은 채 생각했다. 둥지 따위 몇번이고 부서지고 망가지라지. 내가 네 곁에 있기만 하다면.
그러나 정작 하인리히는 어둠 속에서 붉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희미한 두려움 속에서, 몸이 꿰뚫리던 귀신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내가... 그놈을 완전히 끝장냈던가?
문을 열자, 눈앞에는 어른스럽게 꾸민 모니카가 금색 달처럼 환하고 아름답게 서 있었다. 하인리히는 노골적으로 짜증난 표정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모니카가 열받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문틈에 구두를 끼워넣고는 크게 인사했다.
"어머, 하인리히! 직접! 문을 열어주며! 맞이해주다니! 기뻐!" "웃기지 마. 저놈이 부엌에서 못 움직인다고 나보고 나가보라 한 거야." "오늘 식사도! 네가 초대해줬다며! 고마워!" "내가 아니라 저놈이...!"
말을 하느니 죽겠다는 얼굴로 하인리히는 마지못해 문을 활짝 열었다. 모니카는 우아하게 한 걸음 들어와 까딱 인사를 하고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냄비 속을 휘젓던 테오도르가 그녀를 반기며 키스했다.
"어서 와. 미안해, 차로 마중나가고 싶었는데 상태가 안 좋아서 정비소에 맡기려고." "멀지도 않은걸. 뭐 도와줄 건 없어? 디저트로 엄마가 만든 푸딩 좀 가져왔어." "오, 다행이네. 마침 디저트가 없어서 하인리히에게 나가서 좀 사오라 시킬까 했거든." "다 좋은데 저기 모퉁이 베커라이에선 사지 마. 전에 벌레 나오는 걸 봐서, 으!"
모니카와 테오도르는 정답게 어깨를 맞대고 서서 요리를 마무리했다. 그가 거실 소파에 늘어져서 TV 리모콘을 돌리던 하인리히를 향해 소리쳤다.
"하인리히! 식탁 준비 좀 해 줘!" "예이, 알아모셔야죠."
투덜대면서도 하인리히는 삼인분의 접시와 스푼, 포크, 나이프를 식탁에 차리고 테오도르가 건네는 스프 단지를 옮겼다. 테오도르와 모니카도 사워크림을 곁들인 감자와 아보카도 샐러드, 오븐에서 구워낸 돼지고기 접시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훈김이 테이블 위에 퍼졌고, 맥주가 잔에 채워졌다. "말해두지만 내가 초대한 거 아니다."
음식엔 아직 손도 안 대고 맥주나 홀짝거리며 하인리히가 부르퉁하게 내뱉었다. 모니카는 별 재미있는 소릴 다 들었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테드, 목은 좀 어때. 괜찮아?" "응, 긁힌 것 뿐인데. 흔적도 안 남을 거래."
테오도르는 이제 거즈 한겹만 붙이고 있는 목을 기울여 모니카에게 보여주었다. 모니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테오도르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테오도르와 하인리히를 번갈아 쳐다봤다.
"하인리히, 네가 이유없이 난폭한 짓을 할 사람이라곤 생각 안 하지만."
아, 아, 하고 알겠다는 듯 하인리히는 두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사실 모니카가 들이닥치자마자 문옆에 세워둔 큰 스탠드로 자기 머리를 후려친다 해도 할 말 없다고 각오하긴 했다.
"맹세해. 앞으론 결코 내 손으로 테오도르를 다치게 하지 않을게." "맹세할 수 있어?" "결코, 다시는. 테오도르를."
진지한 표정이 된 하인리히에게 그만 됐다는 듯 테오도르가 끼여들었다.
"그래, 모니카. 남들은 멋대로 떠들게 내버려 둬. 난 지금 둘다 함께 있어서 정말 좋은걸."
끝까지 미심쩍은 듯 모니카의 시선이, 오랫동안 하인리히의 옆얼굴에 머물다가 스치고 갔다. 그 자리가 어쩐지 칼로 베인 듯 따끔거린다. 하인리히는 목구멍으로 킥킥거리며 의자 뒤로 거만하게 기댔다.
"난 지긋지긋하다. 졸업하자마자 둘이 빨리 결혼해서 떠나버려."
테오도르가 웃으며 찬성이라는 듯 포크와 나이프를 쨍 소리나게 부딪쳤다. 그리고 멋드러진 솜씨로 돼지통다리구이를 썰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는 테오도르가 좋아하지만 하인리히는 모르는 어떤 오페라 곡이 흘러나오고, 열어둔 창문 너머로 바람이 새어들어와 커튼을 날렸다. 평소에는 차 소음과 매연냄새만 났지만 비가 오고 난 후라 오늘 공기는 깨끗했다. 오래되고 좁은 아파트조차 생기가 돌고 빛나보였다.
테오도르와 모니카는 식탁 앞에서 서로 바싹 붙어앉은 채 손을 하나씩 마주잡고 속닥속닥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끔 테오도르는 웃으며 모니카의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췄다.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소년도 아니고 청년도 아닌 이제 피어나기 시작한 절묘한 매력으로 가득했다. 그의 윤기나는 검은 머리칼과 모니카의 굽슬거리는 금발이 화사하게 어울렸다.
하인리히는 이 모든 걸 하나하나 세세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 며칠 간 한대도 피우지 않았는데 기분은 썩 괜찮았다.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고, 썩은 냄새도 풍겨오지 않는다. 세상은 좀더 깨끗하고 고요하다. 조금 더 참으면 여기도 있을 만한 곳이 될까...? 하인리히는 피식거리는 웃음으로 마음 속 목소리를 눌러 없앴다. 소파에 가로누워 맞은편 팔걸이에 긴 다리를 멋대로 걸친 채 모니카가 가져온 푸딩을 먹었다.
"...쳇, 맛있잖아."
트집을 잡을 수 없으니 죄다 먹어치워서 화를 풀어야겠다. 그는 흥얼거리며 테오도르 몫의 푸딩을 한 숟갈 푹 펐다.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렸다.
"내 건데?"
요란한 소리를 듣고 하인리히는 의아한 듯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져있는 커플을 내버려둔 채, 핸드폰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여보세...."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얼음물을 맞은 듯 온몸의 피가 싹 식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 귀에서 머리까지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그 목소리가, 그자가 말하는 언어를 한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일본어다. 그리고 일본어로 말하는 이 남자는.......
"하인리히냐?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들었다."
아버지란 남자였다. 하인리히는 지금 이 순간 발밑이 뚫려 자신을 삼켜버리길 바랐다. 진심으로,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