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카는 늘상 그렇듯이 얇은 셔츠 한장만 꿰차입고 베란다에 서서 멍하니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추운데 뭐해요?”
“어, 싀문쒸.”
뭐라 말을 건네려던 텐카는 시문의 마스크 차림을 보고는 당황해서 말을 멈췄다.
“독감이라네요. 옮길수도 있다니까 텐카씨도 조심하세요.”
“독감?”
“인플루엔자요.”
“아, Grippe. 어, 시문씨 아팠습니까?”
“좀 으슬으슬하긴 했지만 괜찮은거 같았는데, 바람이가 열이 있는 것 같다고 병원에 가보라고 하도 뭐라길래 들렀더니 그렇다네요.”
“Grippe 면 엄청 아프고 그렇지 않습니까? 시문씨, 얼른 들어갑시다.”
텐카가 유래없이 또렷한 발음으로 말하며 허둥지둥 시문을 데리고 들어갔다.
텐카씨가 당황하는 일도 다 있네, 저 또렷하게 들리는 발음은 열때문에 내가 귀가 멍해서일까, 시문은 멍한 눈으로 텐카를 바라보았다.
대꾸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문에 더 당황한 텐카는 서둘러 이불을 깔고 시문을 눕혔다.
“약은 먹었습니까?”
“아, 아직요.”
텐카는 평소답지 않게 허둥대며 부엌으로 가 얼른 생수를 한병 집어들고 들어왔다.
“점심식사는 했습니까?”
“아..”
“이 약 빈속에 먹어도 되는건가?”
텐카는 중얼대며 약봉지를 앞뒤로 읽어보았다.
“식후 30분에 먹으라고 적혀 있습니다. 시문씨 뭐라도 좀 먹어야 될것 같습니다.”
텐카가 벌떡 일어나자 시문이 급하게 텐카를 붙잡았다.
“의사 선생님이 약 일단 한번 먹고, 그다음부터 아침 저녁으로 챙겨먹으면 된다고 했어요. 지금 일단 한번 먹을게요. 저녁부터 밥 챙겨먹으면서 먹으면 돼요.”
“어, 그래도 여기 처방전에는,”
“괜찮아요.”
텐카는 시문이 약을 털어넣는 것을 보고는 다시 안절부절 못하며 시문의 옆에 앉았다.
“옮길수도 있대요, 텐카씨.”
“전 안 아픕니다.”
“아,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거나 그런거요?”
시문이 쿡쿡 웃다 말고 기침을 시작하자 텐카는 대꾸도 못하고 다시 강아지같은 표정으로 앉아서 시문을 내려다보았다.
“잘됐다. 나 아프니까 오늘 텐카씨가 책임지고 집청소 좀 해줘요.”
“.. 집 이정도면 깨끗하지 않습니까.”
“집이 더러워서 감기 걸린거 같아요.”
“그!”
텐카는 뭐라 항변하려다 제가 어질러놓은 방바닥을 보며 다시 조용해졌다.
“저 한숨 잘게요. 이따 깨끗한 집 기대할게요.”
시문은 생긋 웃고는 눈을 감았다.
막상 누워보니 꽤 몸이 아팠던 모양인지 금새 두통이 몰려와서 어지러웠던 것이다.
텐카는 조용히 이불을 끌어올려 시문의 목까지 덮어주고는 방을 나왔다.
“맨날 비실비실대고, 다치고, 하여튼 하루도 성한 날이 없어.”
텐카는 중얼중얼대며 슬리퍼를 끌고 집앞 마트에 들어가 인스턴트 죽과 카모마일티, 대파, 레몬 같은 걸 두서없이 카트에 담았다.
돌아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니 시문은 아직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일단 바닥에 널부러진 옷가지들을 주워 세탁을 하고, 걸레를 꺼내 바닥을 닦았다. 세탁기 소리에 설거지소리까지 겹쳐 꽤나 시끄러웠을텐데도 시문은 깨지 않았다.
텐카가 굴러들어온 후 이 집이 이렇게 깨끗한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가 되고 나서야 텐카는 조용히 시문의 옆에 앉았다.
해가 지면서 창문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시문은 잠결에 가끔 발작적으로 기침을 했고, 그때마다 텐카는 당황해서 생수 뚜껑을 열었다가 시문이 깨지않자 다시 뚜껑을 닫는 걸 반복했다.
“음.. 음..”
목이 완전히 부어 잠긴 것 같은 느낌에 시문은 헛기침을 연달아 하다가 눈을 떴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있었다.
“..텐카씨?”
방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지막하게 이름을 불렀다. 목이 잠겨 거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텐카가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일어났습니까?”
“..네..”
“몸은 좀 어떻습니까?”
텐카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정하게 말을 건네자 시문은 어쩐지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목이 좀 아파요.”
“잠깐만요.”
텐카는 얼른 부엌으로 나가 머그컵에 차를 한잔 따라왔다.
“이거 마시면 좀 나을 겁니다.”
연노란빛이 감도는 차를 내려다보고, 다시 텐카를 올려다보고 시문은 조용히 차를 한모금 마셨다.
“이게 뭐예요?!”
생각보다 훨씬 독특한 향에 미묘하게 달고 닝닝한 차의 맛에 욕지기가 올라온 시문은 급하게 입안에 남아있던 액체를 삼켜버리고 텐카를 올려다보았다.
시문의 표정에 당황한 텐카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어머니한테 배운 감기차입니다.”
“도대체 뭘로 만든거예요?”
“카모마일에 파뿌리와 꿀, 레몬을 넣고 끓인 것입니다. 맛이 이상합니까?”
당황해서 시문의 눈치를 보는 텐카가 모처럼 신선해서 시문은 화를 내려다 말고 웃고 말았다.
“엄청 정체불명의 맛이에요.”
“마미가 이거 마시면 감기가 낫는다고 했는데..”
이것저것 넣고 차를 끓였을 텐카를 생각하니 시문은 계속 웃음이 나왔다.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근데 더 마시는건 무리일거 같아요.”
“괜찮습니다. 시문씨. 저녁약 먹기 전에 죽 먹을 수 있겠습니까?”
“죽이요? 텐카씨가 죽을 끓였어요?”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끓이는 건 역시 무리여서 마트에서 사온 것을 데우기만 했습니다. 아, 혹시 모르니까 제가 맛을 먼저 보겠습니다.”
텐카는 다시 허둥지둥 부엌으로 나갔다.
앗 뜨거! 아 뭐야 이거.
혼잣말을 하며 한참 부산을 떨던 텐카가 그릇에 죽을 담아 왔다.
“맛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시문은 쿡쿡 웃으며 텐카가 건네준 죽을 먹기 시작했다. 속이 좀 울렁거려서 많이 먹기는 힘들거 같았지만 인스턴트 죽을 데우기만 했을 뿐이라 그런지 맛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반그릇 정도 먹고 내려놓자 텐카는 얼른 그릇을 치우고 약과 생수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30분 후에 먹어야 합니다.”
“네, 그럴게요.”
시문은 그제서야 방을 둘러보았다.
“진짜 청소했어요?”
“...방이 더러워서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면서요.”
“세상에, 텐카씨, 이렇게까지 청소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잘 개켜진 빨래와 깨끗한 방바닥을 보며 놀란 시문이 묻자 텐카가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바람이 전화와서 묻길래 시문씨 플루라고 알려줬습니다. 명자가 이번주에는 나오지 말고 얼른 나으라고 했습니다. 병문안 온다길래 옮으니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 고마워요.”
“땀을 엄청 흘렸습니다, 시문씨. 옷 갈아입어야 합니다.”
“응, 일단 좀 씻으려구요.”
시문이 이불을 제끼고 일어나자 텐카가 얼른 부축해주었다.
와, 진짜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시문이 씻고 들어와 약을 먹는걸 본 텐카는 시문을 부축해 다시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올려 덮어주었다.
“텐카씨, 옮을 수도 있으니까,”
괜찮으니 이제 나가봐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텐카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시문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봤자 고작 좀 심한 감기예요.”
살짝 웃는 시문을 보고도 텐카는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했다.
“텐카씨?”
“..다치는 거랑 아픈건 다른 겁니다.”
“네?”
“물론 다치는 것도 싫습니다.”
“네에?”
능력이 생긴 후로 시문이 다친적이 한두번도 아닌데다가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기는 커녕 집청소로 아웅다웅 했던 기억만 있던터라 시문은 텐카의 생소한 모습에 당황했다.
“아니, 언제부터,”
시문이 말을 맺기도 전에 텐카가 손바닥으로 시문의 눈을 가렸다.
“텐카씨?”
“시문씨 쉬십시오. 나는 부엌을 좀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다시 들어올 필요야..
시문이 당황하는 사이에 텐카는 다시 부엌으로 나갔다.
달그락달그락 설거지 소리를 들으며 시문은 다시 잠에 빠졌다.
몇시지?
엄청 오래, 길게 잠들어있었던 것 같은 기분에 시문은 눈을 떠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는 4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아직 깜깜한 것으로 보아 새벽 4시인 모양이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텐카가 봉을 들고 시문의 옆에 앉아 시문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잤어요?”
목이 잠겨 나지막하게 텐카에게 말을 건넸지만 텐카는 대답대신 시문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인플루엔자 옮는거라니까 또 흘려들었나보다. 밤새 기침도 제법 했을텐데 제 아무리 바보텐카라도 옮을텐데.
“텐카씨?”
“...아무래도 축시까지는 걱정이 되어서 못 잤습니다. 이제 괜찮을 것 같습니다.”
“걱정이 되다니요?”
“이제 괜찮습니다.”
텐카는 다정하게 시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텐카의 손 끝에서 파지직 붉은 전류가 흘렀다.
“텐카씨?”
시문은 당황하여 벌떡 몸을 일으켜 텐카의 손을 덥썩 잡았다. 고개를 들어 방을 둘러보자 창문 근처에서 붉은 전류의 잔상이 남아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이제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조금 더 자요.”
텐카의 왼손에는 진한 화상 자욱이 두줄 남아있었다. 시문이 당황해서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 있자 텐카가 멋쩍다는 듯이 말했다.
“시문씨 집에서 별일은 없습니다. 정말 걱정안해도 됩니다.”
이럴 때의 텐카는 고집불통이다. 평소에는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떠들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해주지를 않는다.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절대 해주지 않죠, 텐카씨는.”
“...”
“할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해도 되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에요. 당신.”
“시문씨, 그게 아니라,”
“됐어요. 이제.”
괜히 서러워 시문은 눈물이 올라왔다. 뭐가 서럽다고. 이 정체도 모를 반백수건달이, 착한 놈인지 나쁜놈인지 믿어도 될놈인지 믿으면 안될놈인지 알게 뭐라고.
“아니, 정말로 별일 없었습니다.”
“알았어요.”
“아니, 그게.”
“됐어요. 이제. 괜한 이야기 꾸며낼 필요 없어요. 어차피 진심은 전혀 담겨있지 않을텐데.”
열 때문이다. 열 때문에 눈물이 맺히는 것 뿐이다.
해열제를 먹은지 7시간이 지났으니 열이 오를때도 되었지. 괜히 인플루엔자겠어.
집에 타이레놀이 있던가, 아침약을 먹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데.
내가 이놈 손을 왜 아직 잡고 있지. 이거 놔야 하는데.
시문은 멍하니 생각을 하며 텐카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읍!”
순식간에 텐카의 입술이 시문을 덥쳤다.
머리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텐카는 힘을 주어 시문을 세게 그러안고 단단히 키스하기 시작했다.
잡아 먹을듯이 시문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혀로 거칠게 핥다가 하는 통에 시문은 숨이 막히는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었다.
너무 당황해서 코로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시문이 숨이 막혀 헐떡이자 그제서야 텐카가 시문을 놓아주었다.
“뭐..뭐하는 거예요. 독감 옮는 거라니까.”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꺼내는 시문을 조용히 바라보던 텐카가 다시 시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도 되는 말만 하는 건 맞지만,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건 아닙니다.”
“네?”
“시문씨 전에도 그랬고, 아까처럼 완전히 의식이 떨어지면 조금 위험합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능력에 끌려 모여드는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어서 지켰던 것 뿐이지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
“항상 진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을 전혀 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사실은 항상 시문씨 걱정합니다.”
“네?”
열이 오른 머리로는 텐카의 말들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아 시문은 멍하니 텐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금의 키스, 그것도 진심입니다.”
순간 얼굴로 열이 몰려 핑- 어지러움을 느낀 시문은 버벅거리며 자리에 누웠다.
“그.. 지..집에 타이레놀이 있었던가요?”
“네?”
“저, 열이 다시 나는 것 같아서요.”
얼굴이 빨개진 시문을 의아하게 보던 텐카는 잠시 멈칫하더니 씨익- 웃으며 손을 뻗어 시문의 이마를 짚었다.
“어이쿠, 정말 뜨겁네여. 해욜제 먹어야게숩니다, 싀문쒸.”
평소같은 느물대는 말투에 겨우 마음이 놓인 시문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는 소리질렀다.
“부엌 찬장에 해열제가 남아있었던 거 같아요. 좀 가져다 주세요.”
세상에, 간단한 쪽글 예상했는데 이렇게 상세한 시츄에이션까지!! 날백수건달 텐카라니 너무 좋잖아요ㅋㅋㅋㅋ 최고야ㅋㅋㅋㅋㅋ 대파 삐죽 나온 비닐봉다리 들고 걸어왔을 거 생각해도 뿜기고, 이 와중에 시문씨는 글에서 미남향 나... 감사합니다, 윤님(@likehutami). 소비러라시더니 완전 거짓말쟁이셨어8ㅁ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