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덕질계
[텐카시문 생일기념 연성] 눈 내리는 날 누군가 죽었어 본문
눈 내리는 날 누군가 죽었어
사건이 모두 정리되면, 갑자기 온몸의 맥이 탁 풀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다 됐습니다. 이제 보고하고 결재 올리면 이 사건도 끝입니다. 모두 수고했어요. 바람이도 늦게까지 도와줘서 고맙다."
시문이 서류철을 탁 튕기며 일어서자 바람이가 졸린 눈으로 웅얼웅얼 책상 위로 엎어졌다. 소피아도 피곤한 기색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긴 후 에반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시문씨도 수고 많았어요. 어려운 사건이었죠? 무사히 끝났으니 며칠 푹 쉬고 봐요."
"소피아씨도 잘 쉬어요. 나중에 봅시다."
나가는 팀원들을 눈으로 배웅하고 불을 끄려는데 그 순간이 왔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팽팽하게 끊어질 듯 한껏 잡아당겨졌던 신경이 단숨에 풀리는 느낌. 무릎 아래에서 힘이 싹 빠져나갔다. 시문은 서류철을 쥔 채 비틀거렸다.
"무리해써."
현기증 속에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어느새 다가온 텐카가 살짝 쥐듯이 시문의 팔을 받치고 있었다. 시문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무게중심을 기댄 채 뻑뻑한 눈꺼풀 위를 문질렀다. 공기가 새듯이 어지럼증이 물러가며 텐카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이번엔 잠도 안 자고, 정신업시 달려찌. 다 암니다."
24시간 붙어있으니 모를 수가 없지. 시문은 제대로 몸을 세우고 옷깃을 바로잡았다.
"그래도 무사히 해결했으니 됐어요. 하마터면 미궁에 빠질 뻔한 걸 끝냈으니 그게 어딥니까."
"누가 일긔신 밤장님 아니랄카바."
텐카는 투덜거리며 안주머니를 뒤졌다. 다 구겨진 담뱃갑을 들어올리며 씩 눈웃음 쳤다.
"그롬 난 위에서 해피타임이나."
해피타임이 뭐냐고 잔소리가 날아올 만도 했지만 시문은 별말이 없었다. 지치긴 했나보다. 텐카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유쾌한 척 휘파람을 불며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랐다. 옥상문을 열자 새까만 밤하늘이 와락 펼쳐졌다.
새벽 두시, 도시도 잠에 들 시간이라 난간 너머 펼쳐진 어둠 위에는 불빛도 초라했다. "어, 추워." 매서운 칼바람에 귀도 시리고 손가락도 곱았다. 몇번 라이터불이 애매하게 돌다가 겨우 담배 끝에 불이 붙었다. 느긋하게 연기를 가슴속 바닥까지 빨아들이곤 몇곱절로 천천히 내뿜었다.
깜빡,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담배를 반이나 태운 걸 보고 텐카는 조금 놀랐다. 단 1분 1초라도 이렇게 멍하니 보낸 것도 오랜만이다. 그도 그럴 것이, 텐카는 24시간이 송두리째 임무 중이었으니까. 1분 1초마저도 전부.
전부 이시문에게 할애된 시간이다. 타겟에 붙어 밀착감시한다는 건 그런 의미다. 1분 1초, 그 한순간도 자기자신이면 안 된다. 타겟을 지켜보고, 기분을 살피고, 반응하고,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반사적으로 타겟의 모든 말 모든 행동에 맞춰줘야 한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그를 유도하여 장기말처럼 움직일 수 있다면 더욱 좋다.
그러기 위해선 타겟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미움받아 내쳐지지 않을 정도의 눈치 쯤은.... 텐카는 일부러 담배를 한모금 더 깊이 천천히 들이마신 후, 자기 옆이마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정신차려. 아직 멀었는데 벌써 나가떨어지면 어쩌잔 거냐."
낯짝 두꺼운 척, 웃기는 사람인 척 변신하는 정도야 식은죽먹기다. 남 눈치보는 재주는 원래 없었는데 살겠다고 발버둥 치다보니 그럭저럭 익히게 됐다. 이렇게 장기간 풀옵션으로 남에게 기생해본 건 처음이라 지치긴 하지만, 뭐 어떻게든 끝까지 해 낼 자신감도 있다. 텐카는 다 피운 꽁초를 밟아버리고 하나 더 꺼내들었다.
그나마 이시문이 혼자서도 잘 하는 어린이라 좀 살았다. 살살 비위 맞추고 달래준다고 기고만장해서 기어오르는 왕자님이었으면 절대 못 견디지. 못 견디고 말고.
"조금은 이시문이 날 살려준 건가."
그리고 텐카는 알았다. 그렇게까지 이시문이 남 손 안 타고 남에게 의지도 하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투명하고 메말라버린 건 그만큼 쓴맛을 봤기 때문이라고. 말을 안 한다 뿐이지 그도 텐카 자신만큼이나 깊고 어지러운 곡절을 겪어온 것이다.
때로 이시문을 보면 텐카는 기분나쁜 현기증을 느끼곤 했다. 마치 어두운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듯한 느낌. 너도 참 고생하며 산다. 텐카는 어두운 도시를 등지듯 난간에 두 팔을 걸치고는 담배를 문 채 고개를 뒤로 한껏 꺾었다. 새까맣게 빨려들 것 같은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정말 싫은 임무야. 끝나고 두번 다시 만날 일 없으면 좋겠군."
옥상문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지도 않고 그렇게 뒤로 넘어갈 듯 하늘을 보는 채 텐카는 목소리를 교태 떨듯 한 옥타브 올렸다.
"머야, 보고 벌써 끝임니카. 우리 밤장님 번개돌이."
"그런 구닥다리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불퉁하게 대꾸하며 시문이 다가왔다. 텐카는 반쯤 접힌 듯한 괴상한 자세로 시문 앞에 담뱃갑을 내밀었다. 몇개비 안 남아 가벼운 갑을 소리나게 흔들었다.
"사양 말고, 한대?"
"됐습니다. 끊은 지 오래 됐어요."
"밤장님 긔신! 무서븐 남자! 담배 큰은 독한 인간하곤 상종 말라임니다!"
"정말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 오고 난리야."
시문이 기가 막힌 듯 흘겨보며 난간 옆에 기대섰다. 텐카는 맡아보란 듯이 연기를 훅 내뿜었다.
"우리 밤장님 불상하다. 간좁흡연이라도 마니 하세여."
"죽습니다, 진짜."
손에 위협하듯 일렁이는 푸른 번갯불, 낄낄거리며 호들갑 떠는 소리. 언제나와 같다. 피우던 걸 끝내고 코끝에 어리는 매캐한 뒷맛을 음미하며 텐카가 말했다.
"삼일 휴가.... 머 할검니카."
"글쎄요."
시문은 차가운 난간 위로 손가락을 맞대며 하릴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텐카는 그 표정을 알아보았다. 정신없던 사건이 끝나고 현기증이 빠져나간 후 찾아온 허무함. 사건이 없는 형사일 때 이시문은 길 잃은 어린애 같은 표정을 하곤 했다. 텐카는 툭 들쑤시듯 물었다.
"어디 갈 데 업슴니카. 또 방콕? 나도 어디 좀 가 보쟈."
"가긴 어딜 갑니까. 날도 추운데."
"거 머...."
텐카는 귀를 후비다가 맘먹고 직구를 던졌다.
"할아부지."
"할아버지요? 무슨 소리예요."
"지난번, 싀문씌 쓰러져쓸 태 할아부지 못 만나고 갔다임니다. 걱종 마니 하시던데... 그후로 전화도 안 해찌?"
"그야 그렇지만."
"왜여, 멈니카. 못 만날 이유라도 이씀니카?"
"텐카씨가 새삼 할아버지까지 챙기니 그게 더 이상한데요?"
"내가 머! 내가 머! 하면 안 됨니카!"
슬쩍 떠봐서 윤영옥의 생가까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좋지 싶은 속셈이었다. 조금 과감했나 싶어 텐카는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다. 안 내키지만 또 나를 미끼로 한점 던져줘야지.
"...남일 같지 아나서 그럼니다."
"텐카씨하고요?"
"다 때가 있더라고. 만나고 시퍼도 더는 못 만나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니카."
텐카를 가만히 바라보던 시문이 아 하고 감 잡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물어. 내가 모처럼 던져준 내 속살이니까. 내가 불쌍하게 털어놓았던 엄마 얘기를 떠올리라고. 나한테 조금 미안함을 느끼고 한발 양보해. 그게 이시문이잖아. 텐카는 담담한 눈길로 시문의 눈을, 어둠 속에서도 파르스름하게 떠오르는 두 눈을 응시했다. 자, 하나 둘, 지금이야.
시문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그러치?"
"아침 일찍 출발하면... 남해까지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으니까."
"역시 밤장님, 결종하면 화큰함니다!"
텐카는 요란하게 시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실없이 웃는 눈 속으로 어렴풋이 실망이 스쳤다. 미끼를 던진 것도, 먹히리라 확신한 것도 자기자신이지만 그가 진짜 별 저항없이 덥석 물 줄이야... 많이 지쳤나? 아니면 정말 그 장갑을 준 게 신호였던 건가? 나는 정말 네 안에 있나?
작업은 순조롭다고 보고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텐카는 가벼운 무력감을 깊은 속에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숨을 뱉어내자 하얗게 공기 중에 부서지며 차가워졌다. 뭐야, 정말로 순조롭잖아. 그런데 뭐가 불만이냐. 대체 뭘 바라고 있는 거야.
"내일은 날이 맑겠군요. 다행이에요."
"그럼니다, 다행이야."
시문은 앞장서서 옥상 문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텐카는 손을 뻗었다. 그 어깨를 감싸쥐고, 그 고개가 돌아보는 순간 입술을 포갰다. 예상이라도 했던 양, 시문은 잠시 움찔했다가는 잠잠해졌다. 오히려 놀란 것은 텐카 본인이었고, 흔들림을 감추려는 듯이 더 입맞춤에 집중했다. 마주치는 시문의 입술은 차디찼다. 코끝에서 텁텁한 담배 잔향이 맴돌아도 상관없었다. 캄캄한 밤하늘 아래 한점 온기라도 찾듯이 그들은 손으로 서로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오래 맞대고 부볐다. 등과 허리에 휘감겨오는 단단한 팔. 벌어진 입 사이로 나누는 젖은 숨결, 들이마시고 내쉬고.
피로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덥고 눅진한 욕망이 들어찼다. 둘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하고 있었다.
"오늘밤...."
TenkaXSimoon
눈 내리는 날 누군가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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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려 정신없이 혼잡한 서울역을 향해 달리며 시문은 몇번이나 소리쳤다.
"빨리요, 빨리! 2분 남았어요. 차 놓친다고!"
"감니다! 밤장님이나 어서 뛰어여!"
쉬잉 하고 플랫폼에 바람 한줄기만 남긴 채 급행열차가 멀어져갔다. 코트를 휘날리며 두 사람은 허망하게 떠나버린 열차의 뒷꽁지만 쳐다보고 있었다. 시문이 텐카의 옆구리를 밉살스러운 듯 쿡 찔렀다.
"아 거봐요. 내가 늦는다고 했지. 그러게 어제 적당히 일찍 잤어야 했는데!"
"나도 그러케 말했다 머. 근데 밤장님이 즘승이라 야하게 안 놔주니카... 아야! 아야야야야 폭녁굥찰!"
"시끄러워요. 누가 짐승이야. 정줄 놓은게 누구였는데."
셀프로 한심해진 두 사람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계를 흘끗 보고 시문이 중얼거렸다.
"30분 후 완행 있던데 그거라도 탈까요."
"할 수 업찌."
"오래 걸릴 테니까 불평하면 안 됩니다."
"데이트인 셈 치지, 모."
진심인지 아닌지 입을 비죽 내밀고 하는 소리에 시문은 귀신은 왜 이 화상 안 잡아가나 하고 중얼거리며 그 등을 힘껏 내리쳤다.
평일이라 한산한 열차 안은 난방으로 훈훈했다. 두 사람은 코트를 벗어 짐칸에 올리고, 큼직한 창을 사이에 둔 채 마주 보고 앉았다. 안내방송 후 덜컹 하더니 열차는 천천히 플랫폼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반대방향으로 앉은 시문은 뒤에서부터 풍경이 거꾸로 점점 더 빠르게 멀어져가는 걸 지켜보았다.
전날 못 자서인지, 등이 따뜻해지자 겨울 풍경이 단조롭게 흘러가는 걸 보며 잠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괜찮겠지. 한참 걸릴 여정이고, 텐카씨도 같이 있으니까. 시문은 순순히 잠결에 몸을 내맡겼다.
모처럼 꿈도 없는 개운한 잠이었다. 조금 긴장이 풀리는 걸 느끼며 시문은 눈을 떴다.
눈앞에는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손등으로 턱을 받친 텐카의 익숙한 옆모습이 있었다. 열차 안은 고요했다. 덜컹덜컹, 불규칙한 진동. 좌석 여기저기 드문드문 잠에 빠진 사람 그림자들. 오래된 사진처럼 차분하고도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텅 비는 것만 같다. 시문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늘어졌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얼마나 잤죠?"
"몰라. 나도 자버려쏘."
텐카가 이쪽을 바라보더니 짓궂게 히죽 웃었다. "싀문씌 코 골더라." "웃기지 마요. 당신 소리였겠지." "횽사 아조씨가 디집어씌운다!" "매일밤 태평하게 코 골고 이 갈면서 자는 게 누군데요." 쓸데도 없는 입씨름을 한바탕 한 후에 시문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까는 맑더니... 언제 이렇게 흐렸지."
"눈이 오려나 봄니다."
"예보에선 눈 내린다 소리 없던데. 많이 오진 않겠죠?"
시문의 목소리는 심각했다. 텐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자신도 느낀 듯이 픽 웃었다.
"발 묶여서 하루 머물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러케 가기 시러?"
"가기 싫다기 보단... 켕기는 게 많아서겠죠."
이시문 성격에 나이 많은 할아버지 혼자 시골집에 사시도록 방치해둘 리 없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어쩌면 텐카 본인이 일본, 어머니와 살던 그 도시에 절대 찾아가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원래는 철저하게 알아내서 이용해 먹어야 할 테지만 텐카는 왠지 그럴 맘이 들지 않았다.
더이상 캐묻는 대신 텐카는 긴 허리를 슥 일으키더니 창가 쪽으로 낮게 외쳤다.
"눈! 내림니다."
시문도 눈을 크게 뜨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덜컹덜컹 달리는 기차를 따라, 잔뜩 흐렸던 하늘이 따라오며 점점이 싸락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먼지투성이 유리창에 눈송이가 부딪쳐 물자국을 냈다. "눈...." 시문이 생각에 잠긴 듯이 중얼거렸다. 경이에 찬 어린애처럼 창문에 손가락을 대고 하염없이 눈 뿌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고 푸른 눈에 춤추는 눈송이가 가득 찼다.
"그러고보니 어릴 때 아주 큰 눈이 내렸던 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눈이었어요. 지붕이 무너진 집도 있을 정도로. 지금까진 그 눈오던 풍경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겨우내 따뜻한 남해에서는 보기 힘든 큰 눈이었다. 펑펑 쏟아져서 논밭도 언덕도 모래사장도 목화솜처럼 하얗게 묻혀버릴 만큼.
"생각났어요. 지금 막.... 그 눈 내리던 날, 마을 거지가 한 사람 죽었어요."
까마득하게 멀었던 기억의 저편에서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라왔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라 했다. 지저분한 넝마를 두르고 이집 저집 동냥을 해서 빌어먹고 아무 집 담벼락 밑에서 자다가 순경에게 쫓기고 했다. 아이들은 그를 볼 떄마다 따라다니고 놀리고 작은 돌을 던졌다. 어른들은 가까이 가면 잡아먹힌다며 황급히 아이들을 숨기기도 했다.
"시문도 봐써?"
"멀리서만요. 그를 따라다니며 놀리던 아이들은 날 끼워주지도 않았죠. 게다가 당시 내 처지도 그와 별 다를 바 없었으니까."
머리색 눈색이 기분 나쁘게 변한 무당집 애는 자기 앞가림 하기도 버거웠다. 강가의 마른 버드나무가 바람에 크게 휘어지는 날, 그가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를 늘어뜨린 채 흔들흔들 춤추는 것처럼 이상한 몸짓을 하는 걸 멀리서 보아도 그냥 지나쳤다. 그가 웃고 있는지 비통한 표정인지 알아보기도 두려워서.
그다지 춥지 않은 남해 지방에서도 유난히 온화한 날이 이어지던 때였다. 그렇게 따뜻하고 검은 밤에 이상하게도 하얀 눈이 펑펑 내렸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 다음날, 그가 마을 어귀 나무에 목을 맨 채 매달려 있었다네요."
기차는 소리없이 덜컹덜컹, 그들을 싣고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창에 되비친 시문의 서리처럼 스산한 푸른 눈이 붙박히듯 생생하게 유리 위에 떠올라 있었다. 텐카는 여전히 턱을 괸 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시문의 깊은 기억 속에서 그림자가 움직인다, 흔들흔들. 춤을 추는 것처럼.
"어른들이 그 시신을 내려 눈 위에 내려놓았다 해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지 모릅니다. 어딘가에 조용히 묻혔겠죠. 가족도 없었을 테니 정말로 조용한,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눈이 녹고 그가 돌아다니던 동네 길이랑 강둑에 풀이 올라올 때 쯤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죽은 거지 귀신이 나온다는."
어떤 어린애들은 밤에 자다가 목청이 터져라 울면서 그 거지가 잡아가는 꿈을 꿨다고 했다. 어떤 어른들도 밤중에 취해 길을 걷다가 자기 뒤를 따라오는 머리 푼 귀신을 봤다고 했다. 시문이 학교에 가자 몇몇 상급생들이 뒷담으로 불러내 무섭게 물었다.
'야, 무당눈깔. 넌 아무것도 못 봤냐? 뭐? 못 봐? 너 무당눈깔 주제에 아무것도 못 보다니 말이 돼? 너 진짜 아무짝에도 쓸모 없구나? 네 할미도 쓸모없다. 어른들이 그러더라! 큰 무당이라면서 그깟 거지 귀신 하나 못 쫓냐고!'
또 한바탕 싸우고 얼굴이 엉망이 되어 잔뜩 성질이 난 시문을 보고 할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못난 사람들. 자기들 맘이 허해 없는 걸 봐 놓고선.'
'없어요? 정말 그 아저씨... 귀신 된 거 아니에요?'
'아니다, 아가. 흔히들 원한과 괴로움을 품고 죽으면 귀신 된다 하지? 다 그런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외로워서 귀신이 되고... 어떤 사람은 귀신도 못 된단다. 사무치게 외로워서, 귀신이 될 만한 것도 남지가 않아서.'
시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완전히 잊고 있었네요. 당시엔 굉장히 인상적인 일이었는데. 지금까지 다 잊고 있었어. 눈이 펑펑 내리던 날만 기억하고."
"애들 기억이란 게 다 그러치."
"그럴까요."
시문은 씁쓸한 듯 손가락으로 자기 앞머리를 헝클어뜨려 눈가를 가렸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모양입니다. 난 그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서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던 남해의 풍경으로 가려버렸나 봐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싀문."
텐카가 웅크리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을 뻗어 시문의 얼굴선을 따라 가만가만 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가 보자고, 할아버지가 있는 곳에 가자고 말하려 했는데 배신이라도 하듯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돌아갈카?"
"......."
"고향, 가고 십지 않으면 이번엔 그만 두자."
"...가면 너무 많은 게 떠오를 것 같아요. 너무 많은 것들이. 눈 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아."
"그럼 돼써. 돌아가자. 집으로."
사실은 집 같은 거 없잖아. 텐카의 속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있다 해도 그건 이시문의 집이지 네 집이 아닌데 무슨 착각을 하는 거냐. 그러나 그 소리를 물어삼키듯 무시하고 텐카는 웃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 저녁은 서울에서 먹슴니다."
이름도 모를 작은 시골역이었다. 나무로 지은 어설픈 역사 안에 벤치만 몇 개 있고 아무도 없었다.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며 시문과 텐카는 시간이 멎은 듯한 그 텅 빈 역에서 서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 시문의 어깨에 뺨을 얹은 텐카는 코트를 머리 끝까지 덮어쓴 채 반쯤 잠든 것 같았다. 20년은 묵은 듯한 낡은 석탄난로 위에서 주전자가 쉭쉭 소리를 냈다.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시문은 코트 자락 밑으로 손을 넣어 텐카의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을 어루만져 주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어젯밤, 몸을 섞던 열기가 떠올랐다. 벌어진 둔부 사이로 비집고 단단한 것이 파고 들었을 때, 시문은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있는 힘을 다 해 버티다가 허리가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하자 손가락은 힘없이 시트를 놓고 미끄러져 내렸다. 그때 위에서 텐카의 손이 뻗어왔다. 마디가 굵고 힘줄투성이인 손이 내려와 시문의 손등을 덮고, 손가락을 깊숙이 깍지끼었다. 그렇게 손을 쥔 채 시문의 안에서 찌르듯이 세차게 움직여댔다.
목구멍 속으로 눌러참던 시문의 신음이 어느새 밖으로 흘러넘쳤다. 작은 교성이 되어 텐카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섞였다. 땀에 찬 피부가 서로 부딪치고, 속살부터 녹일듯이 잡아먹을 듯이 맞물리며 커져갔다. 벗어나고 싶으면서 동시에 좀더 깊이 넣고 싶어 몸부림치는 시문을 힘있는 근육질 팔이 꽉 움켜쥐고 있었다. 도망칠까 두려워하는 듯.
정신을 놓을 것 같은 절정의 순간 시문은 자신 위로 엎드리며 목덜미에 파묻히는 텐카의 입술을 느꼈다. 그 입술이 무아지경으로 속삭이고 또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한껏 쥐어짜듯 이상하고 뒤틀린 목소리로.
'시문....'
사랑한다고. 몇번이나.
창문이 덜컹덜컹 흔들린다. 작은 시골역을 에워싸듯 흐릿한 은빛 눈보라가 치고 있다. 주전자에서 쉭쉭 피어오르는 김이 유리창을 덮는다. 세상 끝에 둘만 남은 것 같다. 난롯불 때문에 몸 한쪽은 더운데, 텐카에게 닿은 시문의 귓볼은 차가웠다. 그는 꼼짝도 않고 시문의 어깨에 짐짝처럼 구겨져 기대 있었다. 시문이 그 무거운 머리를 좀더 바싹 안아주었다. 들릴 듯 말 듯한 웃음소리가 깔렸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요. 그렇죠, 텐카씨."
혼자 쓸쓸히 목을 매단 누군가를 지워버리고, 눈이 펑펑 내려 쌓이던 도자기빛 같던 풍경만 기억한 것처럼. 정말로 당신이 사랑한다 말했어도 난 믿지 않겠지. 당신 스스로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다. 당신과 계속 함께 있는 나를 보고 싶어서 계속 그것만 보고 있다. 당신이 보여주는 대로 눈 가린 채. 사랑이라고, 속고 속이고 있다.
"그렇죠, 텐카씨."
끌어올린 코트에 파묻힌 채, 텐카는 잠들지 않고 있었다. 죽은 듯이 시문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는 그의 목소리 심장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가만가만 말하고 쓰디쓰게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좋아서. 그의 숨결 하나조차 놓치고 싶지 않아 커다란 몸을 잔뜩 웅크려 붙들고 싶었다.
시문은 사실 날 의심하고 있다. 어렴풋한 느낌이 왔다. 그런데 왜 아직도 날 곁에 두고 있는 걸까. 내가 속이는 대로 담담히 속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난 임무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괜찮다고 문제없다고 독백하며 떠나지 못하는 걸까.
텐카는 지금껏 자신이 죽는다면 추한 귀신이라도 되서 끝까지 발악할 거라고 생각했다. 미련도 많고 분노와 증오도 터질만큼 눌러담은 못난 놈이라 그냥은 억울해서 눈 못 감을 거라고, 자신이 그렇게나 혐오하던 그 구질구질한 귀신들과 똑같은 악령이 되어 갈기갈기 찢겨지기나 할 거라고 마음속으로 믿고 또 체념하고 있었다. 그게 자신에게 걸맞는 지저분한 최후이리라.
그러나 이제 조금은 알겠다. 혼자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는 남해의 거지 이야기를 듣고는 이제 알았다. 정말로 무서운 최후가 무엇인지. 외로운 자는 귀신도 남기지 않는다. 사무치게 외로운 자들은.
눈이 펑펑 내리는 외딴 바닷가 마을에 이 마음을, 진짜가 될 수 없는 사랑을 묻어버릴까....
[2016. 01. 12.]
-- 12월 28일 텐카, 1월 12일 시문 생일 기념 단문입니다.
-- 생일 기념치고는 영 이상한 게 나왔지만-.- 아직 원작 김텐식 성격이 다 드러나지 않아서 이것저것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네요.
-- 생일 축하해요 이시문 반장님. 뻘건 멍게놈 때문에 고생이 많조. 앞으로도 고생길이 험해오. 힘내시오(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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